문학비평

다형 김현승의 고독에서 행복까지

권영상 2014. 1. 9. 14:51

 

 

다형 김현승의 고독에서 행복까지

권영상

 

 

 

 

 

커피를 한잔 마시다 말고 잔을 놓고 일어서 베란다 창으로 갑니다. 창밖에 바람이 부는가 봅니다. 마당에서 날아오른 낙엽 한 장이 창문 틈바구니에 걸려 푸르르 떱니다. 그것은 마치 한 때 내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내 곁에서 멀리 떠나간 과거처럼 자꾸 내 기억을 흔듭니다.

아파트 마당가 느티나무를 내려다봅니다. 그렇게 무성하던 잎들이 다 지고 없습니다. 소묘화처럼 바싹 마른 나무들이 한 때 눈부신 신록을 거느렸음을 누가 믿을까요. 그러나 믿기지 않겠지만 저들에겐 놀랄 만큼 찬란한 봄날이 있었지요. 우리가 그들의 지난 날을 잊고 있을 뿐 그들에겐 틀림없이 그런 과거가 있었지요.

 

 

 

푸른 잎새들이 떨어져 버리면,

내 마음에

다스운 보금자리를 남게 하는

시간의 마른 가지들…….

 

내 마음은 사라진 것들의

푸리즘을 버리지 아니하는

보석상자…….

 

사는 날, 사는 동안 길이 매만져질,

그것은 변함없는 시간들의 결정체!

 

지향없는 길에서나마,

더욱 오래인 동안 머물었어야 했던 일들이

지금은 애련히 떠오르는,

 

그것은 내 마음의 오랜 도가니____이 질그릇 같은 것에

낡은 무늬인 양

눈물과 얼룩이라도 지워 가고자운 마음,

 

모든 것이 가고 말았구나!

더욱 빨리......더욱 아름다이…….

 

 

  

다형 김현승이 1956년에 쓴 “고전주의자”라는 시입니다. 1956년이면 유학을 한 평양에서 숭실전문을 마치고 고향 광주로 돌아와 조선대학교에 재직할 때입니다. 그 사이 아버지도 형도 잃고 난 뒤였으니 ‘모든 것이 가고 말았구나!’고 할 만큼의 아픈 시간이 있었습니다.

  

 

제목이 “고전주의자”입니다. 고전주의가 지나간 것의 미학을 복구하는 거라면 고전주의자는 그런 지나간 과거를 아쉬워하는 이를 말할 테지요.

지나간 것은 질그릇 거죽에 남겨진 무늬처럼 볼품없지만 그런 소박함 때문에 또한 오래 잊을 수 없게 합니다. 머릿속에 오래 남는 시간이란 한 때의 화려했던 순간이 아니라 옷자락에 묻은 지워지지 않는 먹감 빛처럼 대체로 소박한 기억들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앞을 향해 살아가는 중에도 가끔 멈추어 서서 살아온 날을 되돌아다 보는 건 그런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 때문입니다. 남들은 다들 저만큼 앞서 가고 있는데 나만 홀로 떠나지 못하고 남아 머뭇거리던 때가 우리들에겐 있었지요. 아린 듯 한 과거의 자국을 지우고 없었던 듯이 살아내기 위해 우리는 또 얼마나 고독의 근처를 헤매었나요.

 

  

 

창 너머 우면산 능선을 따라 걸어가는 나무들을 봅니다.

저들 능선을 오르다 보면 유별나게 큰 나무들을 많이 만납니다. 아름드리 백양나무나 은사시나무, 또는 참나무, 밤나무.......

그런 범상찮은 나무를 만나면 어른들 앞을 지나치지 못하듯 그냥 지나치기가 쑥스럽습니다.

인사삼아 헛기침을 하고 가든가, 아니면 한번 기대어 보거나, 손으로 거친 목피를 어루만져 보아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건 나무에 대한 내 붙임성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넘어온 험난한 세월의 나이에 나도 모르게 압도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나 사람인 우리나 이 세상에 같이 나온 이상 우리 앞에 닥친 시련을 피해낼 길이 없습니다. 그 점에선 그들이나 우리나 하나도 다를 게 없습니다. 죽음까지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합니다.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여쉬고

안에서도 내어 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고독을 노래하던 다형이 이즈음에 와 행복을 노래합니다. 이 즈음이란 1975년입니다. 그의 나이 62세. 다형의 목숨은 이 무렵 지상의 마지막 끝을 넘나들고 있었습니다. 지병인 고혈압으로 졸도하였다가 간신히 살아나기도 하는 고충을 겪었습니다. 이 시 “지각知覺”은 그가 고혈압으로 숨을 거두기 두 달 전에 <현대문학>에 실은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시 어디에서도 그의 죽음의 그림자는커녕 그 어떤 암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생명으로 가득차 출렁입니다.

 

 

다형은 살아있음 그 자체에 대해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행복도 감사할 일이요, 불행도 감사할 일이라는 거지요. 행복이란 마음에서도 오는 거지만 물질에서도 온다고 합니다. 아내를 얻는다는 것도 행복이요, 살림집을 얻어 자식을 낳는 일도, 승진을 하는 일도, 통장에 돈을 채우는 일도 행복이라는 거지요. 그것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는다면야 그게 비록 물질이라 하여도 그건 충분히 아름다운 행복이지요. 살림을 하나하나 늘여가는 장삼이사들에겐 행복 중에도 가장 큰 행복일 테지요.

사실 행복이란 말은 시 속에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행복이란 말이 너무나 세속적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다형은 그 행복을 시 속에 데려와 아주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파른 ‘마른 나무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처럼 고독의 날을 세우던 다형의 고독도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누그러진 정도가 아니라 세상 ‘보통사람들의 이상’ 속으로 내려온 거지요.

사실 시인은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냉혈의 족속입니다. 현실과 손을 잡는 순간 시인의 손은 썩고, 의식은 부패하고, 펜은 구부러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다형이 시에서 ‘행복’을 들먹거리기까지에는 화산처럼 폭발하는 내면의 요동이 있었을 테지요. 술값을 구걸하며 살았던 천상병 시인이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하기까지의 험난한 아픔이 있었듯 다형에게도 그런 고뇌가 있었을 테지요.

 

 

 

죽음에 직면할 때쯤 사람은 세상과 화해하지만 시인만은 그럴수록 더욱 고독하게 죽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다형은 외롭고 날카로운 인간의 본질적인 고독에서 차츰 걸어 내려와 따스한 인간의 손을 막 잡으려 합니다.

아, 그때에 다형은 그만 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릴케가 그러하였듯 가을을 사랑한 시인입니다. 시인이 가을을 사랑하려면 가을이 떨구고간 낙엽과 벌거벗은 채 서 있는 나무들마저 사랑해야겠지요.

창밖에 서 있는 나목들 어디쯤에 혈압을 진정시키는 알약을 들고 다형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무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의 기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