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독서일기
아흔아홉 개의 꿈(권영상 지음, 미리내출판사)
(조선일보/문화) [책과 생활]
며칠 전 외출 하면서 모처럼 새로 만든 수도복을 입었다가 아무래도 서먹하고 낯설어 다시 헌 옷으로 갈 아 입은 적이 있다. 늘 지니고 다니는 손수건도 새 것으로 바꾸기까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낡아서 부드럽고 허름해서 편안한 손수건 한 장을 속치마 주머니에 넣으며 다시 읽어보는 동시가 있다.
새로이 산 손수건은
곱고 깔끔하긴 하지만
눈물은
받아들이지 못하지요 적어도
손수건이 손수건이려면
깔깔한 성질은 마땅히 버려야지요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손 안에 포근히 잡히는
엄마의 낡은 치맛자락 같은 부드러움
손수건이 손수건일테면
그래야겠지요
알맞게 낡은 뒤에야 한 방울 눈물까지도
따뜻이 받아줄 테니까요.
(권영상의 동시 ‘손수건’)
‘아빠와 함께 읽는 동시’라는 부제가 붙은 권영상님의 ‘아흔 아홉개의 꿈’이라는 동시집에는 가을하늘을 바라보며 낭송하고 싶은 시들이 많다.
지난 여름 어느 강좌에서 권시인이 쓴 ‘밥풀’ ‘머리카락’을 소개하니 시집을 구하고싶다는 독자들이 많아 내가 직접 작가에게 문의를 했는데 ‘밥풀’은 품절되었다면서 보내준 책 이 ‘아흔 아홉개의 꿈’이다. 항상 시간에 쫓기는 삶 속에 마음이 복잡하고 불안하다고 호소하는 이들에게 나는 곧잘 아름다운 동시를 찾아 읽으라고 권유한다.
어느날 문득 거울을 보다가, 책을 읽다가, 사람들을 만나다가,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에는 만사를 제쳐두고 우선 자신과의 만남을 서둘러야 하리라. 분주한 삶의 한가운데 서도 ‘맑고 고요한 마음’ 하나만은 잃지 않는 지혜야말로 오늘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아침마다
세숫물 안에서 만나는 사람
두 손을 세숫물에 담그면
그 사람은 달아난다
나는 여기 남아있는데
그는 달아나
세숫물 밖으로 사라진다
엄마,이걸 보아요
그 사람이 없어졌어요!
그럼, 한참을 기다리거라.
네 마음이 맑아질 때
다시 돌아올 테다
(권영상의 ‘내 마음이 조용해 질 때’)
2002.10.16일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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