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동시 한 편>
엄마를 기다리며
이해인
동생과 둘이서
시장 가신 엄마를 기다리다가
나는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문득 눈을 떠 보니
“언니, 이것 봐!
우리 엄마 냄새 난다.”
벽에 걸려 있는
엄마의 치마폭에 코를 대고
웃고 있는 내 동생.
시장 바구니 들고
골목길을 돌아오는
엄마 모습이
금방 보일 듯하여
나는 동생 손목을 잡고
밖으로 뛰어 나갑니다.
엄마 기다리는 우리 마음에
빨간 노을이 물듭니다.
내 인생의 헙헙한 빈 자리
권영상
이해인 수녀님의 첫 동시집 <엄마와 분꽃>을 받던 때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때가 한창 타들어가는 오월이 눈부시던 때입니다. 운동장 건너편에 선 은행나무 은행잎이 튜브에서 갓 짜낸 연둣빛처럼 향기로웠고, 등나무 벤치의 등나무가 보랏빛 꽃을 마구 피워내던 때입니다.
그때 나는 방배동에 있는 한 여자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5월처럼 내 인생도 막 부풀어오르던 시절이었지요. 어느 날, 수녀님께서 표지가 빨간 <엄마와 분꽃> 스무 권을 아이들과 나누어 보라며 보내주셨습니다.
한창 발랄하던 아이들과 동시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여중생이라면 세상 두려울 것없이 함부로 이야기해도 모두 아름답던 나이지요. ‘수녀님 얼굴보다 시가 더 예쁘다’, ‘수녀님도 엄마가 있느냐?’, ‘수녀님을 우리 반에 초청해 달라.’, ‘나도 수녀가 될래’ 참 말도 많았지요. 시에 관한 이야기보다 절반은 그때 막 떠오르던 ‘이해인 수녀’에 대한 호기심이었지요.
그러고 오후에, 혼자 교실에 앉아 찬찬히 동시집을 읽다가 발견한 시가 ‘엄마를 기다리며’입니다.
“언니, 이것 봐!/ 우리 엄마 냄새 난다.”
나는 여기에서 오래도록 머뭇거렸습니다.
언니가 잠든 사이 동생은 돌아오지 않는 엄마가 보고 싶었을 테지요. 엄마가 안 계신 줄 알면서도 이 방 저 방 빈 방을 다녀보며 괜히 엄마! 엄마! 엄마를 불러도 보았겠지요. 그러다가 빈 집이 무서워 혼자 훌쩍훌쩍 울기도 했을 테고요. 그래도 자꾸 보고 싶어지면 벽에 걸린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엄마 생각을 했겠지요.
그러던 때에 엄마 치맛자락에서 슬쩍 풍기던 엄마 냄새.
내게도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갑작스런 일로 병원에 입원을 하셨지요. 그 후로 17년간, 처음 절반은 병원에 누워계셨고, 나중 절반은 우리 집 안방 아랫목에 누워계셨지요.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당연히 어머니가 안 계셨습니다. 안 계신 줄 알면서도 나는 이 방 저 방 다 돌아다녔습니다. 나중에는 엄마가 대솥밥을 하시던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도 보고, 햇볕에 장독뚜껑을 여닫으시던 뒤란 장독대 곁에도 앉아 보았습니다. 그래도 속이 허전하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여주시던 장독대 옆 석류나무 그늘에 앉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도 비어 있는 마음이 차지 않으면 안방 문을 열고 그 빈 방을 들여다 보곤했지요.
그때 나는, 사람이 머물렀던 빈 자리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공간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그것이 사람 마음을 얼마나 헙헙하게 하고, 얼마나 갈증을 느끼게 하는 줄도 처음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나에게 일찍부터 빈 자리에 대한 의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후, 어머니가 아흔일곱에 돌아가신지 일 년 뒤입니다.
일이 있어 고향 집에 다니러 갔습니다. 고향을 지키는 조카는 어머니 입으시던 옷이며 이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식구들과 술을 한잔 마실 적입니다. 나는 술을 마시다 말고 슬그머니 일어나 어머니 거처하시던 빈 방에 들어갔습니다. 괜히 어머니 생각에 어머니 쓰시던 탁상시계며, 어머니 쓰시던 염주를 만져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 쓰시던 흰색 털실목도리를 내 목에 둘렀습니다.
아, 그때입니다. 불현 털실목도리에서 나던 어머니의 냄새!
땀에 젖어 약간은 큼큼한 이 냄새는 어머니의 냄새였습니다. 어렸을 적 집안 일에 바쁜 어머니 품에서 맡아보던 그 냄새였습니다. 그 어머니의 냄새를 무려 40여 년이 지난 때에 와서야 나는 맡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내 소년 시절의 그 텅 빈 자리는 이 ‘어머니의 냄새’가 실종된, 모성에 대한 후각이 사라진 외로움의 자리였던 셈입니다. 내가 근면히 일을 하고 힘 가작 글을 쓰는 까닭도 어쩌면 그 헙헙한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한 몸짓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엄마를 기다리며’는 어머니가 병원에서 돌아오기를 매양 기다리던 내 어릴 적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린이와 문학> 201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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