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동시 평>봄호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가고 있는 시인들
권영상
우리나라 유일의 아동문학평론지인 《아동문학평론》의 ‘이 계절의 동시 평’이라면 마땅히 동시 평론을 전문으로 하는 평론가 맡아야할 일이다. 그런데도 정통 평론과는 거리가 먼 일개 시를 쓰는 시인이 맡았다. 평론 부탁이 왔을 때 선뜻 거절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한 까닭은 평론가들의 평론 덕분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동시 쓰기에 전념할 수 있었던 부채의식 때문이다.
어쨌거나 우리 동시단에 발표된 지난 해 겨울호에 실린 동시 254편을 모두 읽었다. 참고로 게재된 문학지와 동시 편수를 적는다. 《아동문학평론》에 32편,《시와동화》에 30편, 《오늘의 동시문학》에 18편,《동시마중》에 39편, 《열린아동문학》에 25편, 《아동문예》 9,10월호와 11,12월호에 39편, 《아동문학세상》에 48편이다.
하루 꼬박 눈 뿌리가 아플 만큼 읽었다. 다 읽고 난 뒤 머리에 아프게 남는 말이 있었다. “연구자들은 왜 광복 전 아동문학에만 관심이 있을까?.......개가 빈 죽사발 핥듯이 핥고 또 핥으면서 오매불망하듯이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수수께끼가 현대 한국 아동문학의 연구 현주소이다. 이래도 되나?”라는 최지훈님이 쓴 ‘아평칼럼’이다.
나는 이 글에서 한국 아동문학 ‘연구자들은’이라는 말을 한국의 ‘동시를 쓰는 시인들은’이라 바꾸어 읽어봤다. 오랫동안 동시를 써온 당사자로서 가슴이 뜨끔했다. 눈 뿌리가 아프도록 읽은 동시 254편을 넘겨다보고 꼬집은 말씀이 아닐까, 했다.
1. 생경한 직설
“박상기! / 오늘은 너그 집 가정방문 갈끼다./ 딴 데로 새지 말고 막바로 가 있어라이.”// 우짜노/ 우짜노/ 빽빽이 막내가 빽빽 울고 있을 낀데/ 오줌버캐 앉은 요강 그대로 있을 낀데// 우짜노/ 우짜노/ 달구 새끼 풀어놔서 마당이 난릴낀데/ 나물 팔러 가신 엄만 밤에나 오실 낀데/ 변소도 안 퍼내서 똥이 뿔룩 솟았는데/ 우짜노/ 우짜노/ 쇠지랑물 철벅철벅 똥파리들 난릴 낀데//동생들 밥 먹느라 부뚜막이 난릴 낀데/ 선생님 오시면 드릴 것도 없는데// 우짜노/ 우짜노/ 우짜믄 좋노.
- 이수경의「가정방문」전문 (《시와 동화》 2013년 겨울호)
그래도 ‘빈 죽사발을 핥듯’ 타성처럼 또 누군가가 밟고 간 길을 따라가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그중 한 분이 이수경이다. 손가락질을 받으며 홀로 길을 내고 가는 시인의 벅찬 고뇌가 보인다. 처음 이 시를 읽을 때 세상에 무슨 이런 생짜시가 다 있지, 하다가 세상에 뭐 이런 발칙한 시인이 다 있어, 하다가 내 몸이 다시 바짝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이 시는 제목이 그러하듯 1960~1970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시점으로 보자면 과거다. 여태까지 우리 동시문단이 써온 과거에 대한 시들이란 게 대개가 ‘그리움’이다. 그러니까 그럴싸한 시어를 동원해 그때의 그 농경문화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다. 그러나 이 시는 어떤가? 그들이 피해가던 간난한 현실을 직설적인 언어로 구역질 날 만큼 솔직하게 발설하고 있다. 70년대의 총체적 문화를 카메라로 훑듯 송두리째 까발리듯 발가벗겨낸다. 마치 치부를 다 드러내 듯 한 이 시의 문법이야말로 낯설고도 생경하다.
이 시는 과거를 소재로 한 다른 시들과 분명한 차별이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문단에서도 충분히 그 존재의 가치와 유효성이 돋보인다.
밥을 지어 뜸이 들자/ 엄마는 밥 좀 퍼 보라고 하신다/ 밥을 밥통에 푸고 밥그릇에도 펐다/ 밥주걱에 닥지닥지 붙은 밥/ 그냥 버릴 순 없었다/ 밥주걱 밥을 숟가락으로 긁어먹기 시작했다/ ‘엄마는 20년 넘게 밥주걱 긁어 먹어 왔단다./ 긁어 먹을수록 밥맛이 고소해 좋아야’/긁어먹으니 정말 고소하고 더 맛있다/ 케이크보다 달콤하고 고소해 정말 맛있다/ 긁어 먹는 밥 이렇게 맛있음 처음 알았다.
-이준섭의 「고소한 밥주걱」전문 (《아동문학평론》2013년 겨울호)
생경한 시 중에 이준섭의 시가 있다. 이수경, 이준섭의 시는 254편의 시 중에서 가장 건강한 모습으로, 그리고 가장 솔직하게 다가왔다. 다른 시들이 뭐 그저 그만 그만한 소재를 가지고 누구나 골라 쓰는 이미 단련된 시어로 시를 썼다면 이들의 시는 그와는 선연히 다르다. 이들의 시어는 문단에 물들지 않았다. 세련되지 않았다. 촌스러운 듯 하면서도 생경하다는 점이다.
밥주걱에 붙은 밥은 ‘닥지닥지’라고 경솔하게 표현하거나 밥을 ‘그냥 버리다’고 감히 말하려 한다. 거기다가 엄마가 ‘20년 넘게 밥주걱 긁어 먹어왔’다는 식의 ‘점잖지 못한’ 말도 거리낌 없이 표현한다. 이 시는 그런 거친 방식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해오던 방식이 아닌 다른 강렬한 방식으로 ‘밥’을 사랑한다.
그런데 이런 직설적인 표현들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시어가 일상 언어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역설적이게도 시는 잘 정련된 문학 언어로부터 멀어질 때 솔직한 반향을 이끌어낼 수 있겠다.
2. 자연에 대한 폭력
사람을 태우려고 태어난 게 아닌데/ 공을 굴리려고 태어난 게 아닌데// 앉아!/ 돌아!/ 가만히 있어!/ 훈련을 받는다 / “말 안 들으면 때려야 돼.”/ 쇠꼬챙이가 달린 막대기로/ 머리를 찍힌다./쇠고랑에 발을 묶인다./주름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코끼리를 적신다.// 코끼리를 차마 보지 못하고/ 뚝뚝 눈물 떨어뜨렸던 아이가 자라서/ 앉아! 돌아! 가만히 있어!/ 쇠꼬챙이가 달린 막대기를 든다.// 누가 코끼리를 울게 했을까?/ 매 맞고 온순해진 코끼리 등에 올라/ 기념 사진 찍는 우리./ 코끼리 쇼를 보고/ 박수 치는 우리
-김미혜의 「누가 코끼리를 울게 했을까」전문 (《동시마중》 2014년 1.2월호)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너무나 솔직하다. 쇠꼬챙이가 달린 막대기로 코끼리를 다루는 모습을 본 아이는 자라서 그도 그 누구를 향해 쇠꼬챙이를 든다는 매우 전율 끼치는 메시지다. 실제 범죄자의 다수는 어렸을 때 동물에 대한 폭력을 경험했다고 한다. 인류가 동물의 권리와 복지문제를 명문화한 것은 1635년 아일랜드에서부터다. 약자에게도 행복 추구권이 있다는 것이다. 이건 육식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에게도 더 나은 환경에서 생존할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코끼리가 축구공을 굴리고, 돌고래가 뛰어올라 링을 통과할 때 우리는 환호한다. 그러나 뒤에서 자행되는 동물학대를 우리는 외면한다. 같은 지면의 김영승의 ‘참치는 왜 잡는가?’도 참치를 잡는 인간의 잔혹성을 다루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시는 순수하다.
그래, 나 개다./ 그게 어때서./ 네가 사람이라고 해서/ 나한테 함부로 하는 건/ 옳지 않아./ 나도 너한테 함부로 하지 않잖아./ 그건/ 새도 마찬가지고/ 나무도 마찬가지야./ 누구한테도 함부로/ 해선 안 돼./ 네가 어쩌다 사람이 됐듯이/ 개도 새도 나무도/ 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태어난 거야./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 개는 개로/ 새는 새로/나무는 나무로 말야./ 내 말/ 알겠지?
-백창우의 「그래, 나 개다」 전문 (《동시마중》 2014년 1.2월호)
약자를 옹호하는 상황에서 항상 쓰이는 말이 있다. 역지사지다. 이 시의 화자는 ‘나’인 개다. 개가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에게 그래서는 안 되는 이유를 어른처럼 타이른다. “네가 어쩌다 사람이 됐듯이/개도 새도 나무도/ 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태어난 거야”라는 말의 배경엔 세상 사물의 평등관이 있다. 나는 지금 개지만 사람으로도 태어날 수 있었고, 너는 지금 사람이지만 개로도 태어날 수 있었다는. 강자인 사람이 약자인 동물과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다른 동물이 아닌 하필 ‘개’의 입을 통해 설득할 수밖에 없었던 고뇌를 알겠다.
3.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
초록 토끼를 만났다/ 거짓말이 아니다/ 너한테만 얘기하는 건데/ 전에 난 초록 호랑이도 만난 적 있다니까// 난 늘 이상하고/ 신기한 세상을 기다렸어// ‘초록 토끼를 만났다’고/ 또박 또박 써본다/ 내 비밀을 기억해 둬야 하니까/ 그게 나에게 힘이 되니까.
-송찬호의 「토끼를 만났다」 전문 (《동시마중》2014년 1.2월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문득 떠오른다. 어쨌거나 이 시는 초록 토끼를 만났다는 어쩌면 거짓말 같은, 그러나 너무도 믿고 싶은 독특한 모티프에서 출발한다. 어린 독자들은 늘 신기한 세상을 꿈꾼다. 몸이 늘었다 줄었다하거나, 담뱃대를 입에 물고 인생을 논하는 애벌레를 만나거나, 이 세상에 없는 초록 호랑이를 만나고 싶어 한다. 만나지 못하고도 만났다고 믿으려 한다. 어린이들은 그런 나만의 비밀스러운 세상을 하나 더 갖고 싶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풀어낼 수 없는 ‘옛날에 옛날에’와 같은 신비로운 시공간이 ‘나에게 힘이 되’기 때문이다.
봄 밭 원고지에/ 상추씨를 뿌리면// 상추들이 줄 맞추어/ 예쁘게 글씨를 쓴다.// 할머니께서 오늘은 상추를 솎으며/ 여기는 비워둬야 띄어쓰기가 맞지// 비워둔 칸에다가/ 또 풀들이 채우면// 여기는 비워야 한다니까/ 띄어쓰기가 틀린다니까.
-안영선의 「봄 밭 원고지」 전문 (《열린아동문학》2013년 겨울호)
이 시 역시 독특한 모티프에서 출발한다. ‘봄밭’을 원고지로 본다는 점이다. 대상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시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흘러간다. ‘상추’는 ‘글씨’가 되고, 상추를 솎아낸 자리는 ‘띄어쓰기에 맞’는 원고지 칸이 된다. 맨숭맨숭해질 뻔한 상추밭이 ‘원고지’라는 독특한 모티프에 힘입어 전혀 새로운 풍경으로 살아난다.
‘봄밭은 원고지다’ 같은 독특한 설정은 독자로 하여금 뜻밖의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그래서 시의 역사는 언제나 새롭고 낯선 방향으로 발전한다.
마지막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시들’에 관해 써 보려 했으나 지면이 부족했다. 정두리의 「나이값」, 안금자의 「비밀」, 최명란의 「방학숙제」 등의 시들이 인생의 비밀을 시속에 언뜻언뜻 숨겨두고 있었다.
겨울호의 동시 254편을 처음 읽을 때 나는 좀 서운했다. 동시를 오래 써온 동업자로서 동시라는 틀 안에 그냥 안주하려는 몸짓을 더러 보면서 뼈아픈 자성에 시달렸다.
그러나 지금, 거친 들판을 가듯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가고 있는 시인들을 만난 기쁨도 적지 않다. 좁은 소견이지만 문학지에 넣는 시들은 완성된 시보다 뭔가 시도하는 시를 보여주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그 작품에 자신의 색깔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다듬고 다듬은 시에서는 자신의 색깔을 발견하기 어렵다. 발표지가 시인의 숨결과 창작 당시의 풋풋함을 서로 느낄 수 있는 장이 되었으면 싶다. 아무 무리 없이 말쑥하게 잘 쓰여진 시보다 덜 다듬어졌어도 방향이 분명한 시가 우리 동시문학의 다양성을 키워 가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아동문학평론 201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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