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시적 화자와 시의 전달력

권영상 2014. 8. 25. 21:36

<이 계절의 동시평> 여름호

시적 화자와 시의 전달력

권영상

 

 

 

시는 경험에서 태어난다. 어쩌면 시는 경험의 산물이다. 좋은 경험은 좋은 시를 생산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경험을 한 이의 시가 수작일 거라는 가설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좋은 경험이 좋은 시가 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경험의 의미를 예리하게 세우는 시정신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일이 익어 떨어지는 시간이 필요하듯 하나의 경험이 시로 영글기를 기다리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릴케는, 추억이 많아지면 다음에는 그것을 망각할 수가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다시 추억이 되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커다란 인내심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숙성된 시의 메시지를 누구의 입을 통해 시로 풀어낼 것인가도 시를 전달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시적 화자라고 하는데 단순히 화자의 입만 빌리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해석력과 이해시키는 힘을 통틀어 말한다. 시적화자에는 시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나의 눈과 나의 감각과 나의 생각을 통해 전달하는 1인칭 화자가 있고, 작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동화에서 복잡한 관점이라 말하는 3인칭 화자가 있다.

봄호에서 읽은 결과 우리 동시인들은 대부분 1인칭보다 3인칭 화자를 선호한다. 어느 쪽이 더 전달력(감동)이 강한가에 대한 답은 없다. 일반적으로 어린이 문학에서는 1인칭 화자일 경우, 독자가 시속 화자가 되어 공감을 쉽게 할 수 있다는 정도이다.

 

 

1. 1인칭 화자, 가족에 대한 사랑

 

 

 

앗!/ 누군가 내 귀를 망치로 때린 것 같았다.// 아빠 생신날/ 벌에게 쏘였다. 꽃밭에서.// -된장, 된장 어디 있어? /-빨간약 좀 갖고 와. /-119를 불러요.// 고모들이 한마디씩 할 때/ 작은아빠가 말했다/ -참아 봐!/ 아무도 너 대신 아파해 줄 수 없단다.// 봄부터 항암주사 맞느라/ 민둥산 머리 된 작은아빠//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나도 더 이 상 울지 않았다.

 

                                                  서금복의 너는 혼자야 전문 (열린아동문학 2014년 봄호)

 

 

눈 쌓인 겨울/ 아침 동네 할아버지 모두/ 우리 집에 오셨다.// 담배 냄새/ 메주 냄새/ 합창을 해도// 우리 집 사랑방은/ 따스하고 행복한/ 이야기꽃방이었다.// 뜨끈한 떡만둣국 드시면서/ “이 집 며느리 복 받으리.”// 우리 엄마를 칭찬하셨다.

 

                                                        황베드로의 고향집 전문 (열린아동문학 2014년 봄호)

 

 

 

가족을 배경으로 하는 시는 1인칭 화자가 대부분이다. ‘나’는 가족이라는 세계 안에서 어떤 관계망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관계망 안에서 어떤 포지션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어린이 독자가 공유하는 경험이다. 그런 점에서 1인칭 시점은 공감을 위한 비용 부담이 적다는 잇점이 있다.

서금복의 시의 전반부는 웬만한 독자라면 두루 겪어보았음직한 경험이 진술되고 있다. 그러나 후반부, ‘참아 봐!/ 아무도 너 대신 아파해 줄 수 없단다’는 작은아빠의 말은 나만의 독특한 경험이다. 나와 작은아빠라는 가족관계가 아니고는 얻을 수 없는 고귀하면서도 눈물겨운 정보다. 이처럼 더 이상 울 수 없는 소중한 체험을 ‘나’의 입을 통해 전달할 때 전달력이 더욱 증가함을 잘 보여준다.

 

 

 

황베드로의 ‘고향집’의 이야기 속에도 화자인 ‘나’가 이야기꽃방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상상할 수 있다. 비록 담배 냄새나는 방이지만 예배를 보러온 사람들이 만둣국을 맛있게 드실 수 있도록 엄마가 음식을 나르거나 그 일을 도와주는 배경 속에 ‘나’가 있다. 그 점에서 화자인 ‘나’와 독자인 ‘나’가 동일시 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시인은 신앙심 깊은 한 여인의 표상을 시인이 아는 방식이 아닌 시속 화자인 ‘나’가 아는 독특한 체험으로 구체화시키고 있다. 성녀같은 여인을 만드는 데는 이미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나의 엄마’를 차용하는 일이 훨씬 표현 비용이 절감되기 때문이다.

1인칭 화자는 나만의 독특한 내면의 경험을 드러내어 공감도를 높이는데 효과적인 듯 하다. 그러나 너무 사고의 내면으로 파고들거나 거기서 얻은 결정물을 드러낼 경우 독자와의 소통이 어려운 점도 있다.

 

 

 

2. 3인칭 화자, 자연에 대한 경외

 

 

 

그 앤 언제나/ 푸르게 살아./ 욕심은 다 버리고/ 텅 빈 마음으로 살지./ 그렇지만 그 앤/ 비뚤어지지 않아./ 가끔은 몸을 굽힐지라도/ 절대로 꺾이지는 않고,/ 언제나 똑바로 서서/ 푸른 하늘을 우러르지./ 그러다가 어느 날/ 푸른 바람 잊지 않고 찾아와 주면/ 온몸을 내맡겨 춤을 추지./ 온몸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지.

 

                                                        문삼석의 대나무 전문 (참여문학 2014년 봄호)

 

 

헬리콥터는 퉁퉁퉁퉁/ 요란스럽게/ 날아오르고 내려앉고// 잠자리는 그냥/ 사르르 살풋/ 날아오르고 내려앉고// 정말정말/ 솜씨가 달라// 하느님은.

 

                                                       윤이현의 솜씨가 달라 전문 (참여문학 2014년 봄호)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시는 대부분이 3인칭을 시의 화자로 채택한다. 인간세계와 자연계, 그 자체가 서로 3인칭의 관계이니까. 어린이들은 생활에 근접한 벌레나 곤충과 같은 작은 자연물에는 호기심을 보인다. 그러나 원경의 숲이나 산, 강, 들판, 바다 등에 대해서는 시야를 넓히기 어렵다. 더구나 변화가 느린 원경의 자연이 주는 순응, 번창, 희망, 휴식, 죽음 재앙, 고독 등은 추상적이고, 부정적 이미지를 갖는다. 어쩌면 어린이가 자연과 금방 친숙해지지 못하는 이유는 이런 이미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삼석의 ‘대나무’는 그런 고려 때문인지 대나무를 의인화하여 독자들 곁에 바짝 끌어당긴다. 이것은 3인칭 시점이 독자와 거리감을 갖게 하거나 독자가 시의 바깥에서 화자가 들려주는 말을 건성건성 들을 우려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곧 대나무의 무소유와 고고한 삶의 자세라는 주제를 자칫하면 귓등으로 흘려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독자는 시인을 통해서 자연물의 높은 정신성과 고도의 정보를 습득한다는 장점도 있다. 자연의 세계와 만나게 해주는 시점이 3인칭 시점의 잇점이다.

 

 

 

1인칭 시점은 ‘높은 가치나 덕목’을 시 속에 담을 수 없다. 초등학생 수준이어야할 화자인 ‘나’의 지적수준이나 정보해석력 때문이다. 이것이 1인칭 화자의 한계점이다. 그렇다고 1인칭 화자의 발달 수준을 능가하는 정보를 전달하면 어른시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약점이 있다.

윤이현의 ‘솜씨가 달라’도 3인칭으로 자연의 경외를 주제로 삼고 있다. 인공제작물인 헬리콥터는 요란한 소음을 동반하지만 자연물인 잠자리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다. 이 두 상반된 사실을 제시하고 마지막 부분에서 ‘정말정말/ 솜씨가 달라// 하느님은.’ 하고 시인은 두 정보의 가치를 판단하고 만다. 이런 경제성 때문에 누구나 3인칭 시의 유혹에 빠질지도 모른다. 독자가 이 시속에 동참하여 판단할 여지를 막는, 다시 말하면 3인칭 화자의 주관에 휘둘릴 우려가 있다.

 

 

 

3. 3인칭 화자, 사회문제

 

 

 

두메산골/ 산자락에서/ 할머니 보살핌으로/ 꼭꼭 숨어/ 잘 자란/ 노오란/ 옥수수// 도시로/ 이삿짐에 실려와/ 뻥튀기 성형수술// 영화배우처럼/ 몰라보게 예쁘게 변했다.// 이름도/ 세련되게/ 팝콘// 동그란 종이 통속에/ 가득 담겨/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김관식의팝콘 전문 (참여문학 2014년 봄호)

 

 

신은 탁자에 놓인 기도문 뭉치를 펼쳤어/ 전쟁에 이기게 해주옵소서/ 부자 되게 해주세요/ 시험에 꼭 붙여주세요/ 신은 뭉치를 탁 덮었어/ 민들레 씨앗이 포르르 날렸지/ “너는 바라는 게 없느냐?”/ 민들레 씨앗은 생긋 웃었어/ 그리고 고개를 돌렸지/ “바라는 게 정말 없느냐?”/ 산들바람 한 줄기가 불었어/ 민들레 씨앗이 말했지/ “나도 같이 가!”

 

                                     이옥용의신과 민들레 씨앗 전문 (어린이책이야기 2013년 겨울호)

 

 

 

 

사회문제를 다루는 시들에서도 3인칭 화자를 많이 본다. 가정과 학교라는 좁은 공간이 어린이 독자들의 주된 세계다. 그러므로 그 바깥 세계를 펼쳐보이는 것이야말로 의미있는 일이다. 무엇보다 문학은 사회를 잘 압축해놓은 구조물이다. 그점에서 1인칭 화자보다 어른인 시인 자신의 진지한 시각과 판단과 해석이 요구되리라 본다.

 

 

김관식의 ‘팝콘’은 두메산골 옥수수가 팝콘이 되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것이 겉의 구조다. 그 안에는 성형수술을 통해 세련(?)되어 가는 잘못된 세태라는 숨은 구조가 있다. 김관식은 성형 세태를 탓하기 위해 정색을 하고 덤비지 않는다. 두메산골, 할머니, 뻥튀기, 영화배우, 팝콘, 극장 등의 비교적 저항감이 없는 친숙한 시어들로 포장하는 배려를 아까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달하려는 의도를 무리없이 잘 전하고 있다.

 

 

 

‘신과 민들레 씨앗’의 이옥용도 이 점을 고려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신을 인격화하고, 민들레도 의인화하였다. 인간들의 끝없는 욕망을 향해 한 마디하고 싶어하는 화자의 입을 잘 관리하고 있다. 더구나 신과 민들레의 정면 대결보다 외면하는 방식을 통해 주제를 전달하려고 한다. 여기서 시인은 자칫 3인칭 화자가 범하기 쉬운 ‘한 마디’를 독자에게 넘길 줄 아는 배려심을 보인다. 3인칭 화자의 시가 휴지쪽이 되기 쉬운 까닭은 ‘그 한 마디’를 화자 자신이 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때문이다. 신나는, 재미난, 귀여운, 아름다운, 호젓한, 즐거운 등의 수식어로 억지감동을 요구하는 일은 3인칭이 범하기 쉬운 함정이다.

 

 

 

4. 1인칭과 3인칭의 화자

 

 

 

지난겨울 푹푹 눈 쌓였던 길에/나 발랑 넘어졌던 그 자리에// 제비꽃이/ 제비꽃이/ 제비꽃이// 웃네// 여기서 꽈당,/ 엉덩방아 찧던 나를// 제비꽃이/ 제비꽃이/ 제비꽃이// 보았나

 

                                                 장영복의 보았나 전문 (어린이와 문학 2014년 봄호)

 

 

구름 많은 날이면 낮달은 더 즐겁다. 몽실몽실 펼쳐진 구름들 사이 숨기놀이 하기를 좋아한다. 거대한 용을 덮고 있는 비늘 한 조각이 돼 본다. 귀여운 아기 양의 포근한 솜털이 돼본다. 히히힝, 응석 많은 새끼 조랑말의 토실한 엉덩이가 돼본다. 하늘을 삐끔삐끔 헤엄쳐가는 물고기의 지느러미 노릇도 한번 해본다.

 

                                                 정유경의 낮달 전반부 ( 어린이와 문학 2014년 봄호)

 

 

 

장영복의 ‘보았나’는 1인칭 화자를 등장시킨다. 지난겨울 미끄러졌던 그 자리에 제비꽃이 폈다. 제비꽃은 그때 그런 나를 보았을까, 라는 극히 간명하면서도 반복어를 사용하는 높은 테크닉을 구사한다. 화자의 내면, 곧 나의 과거의 부끄러움이 주된 테마다. 여기에서 이 부끄러움의 감정을 확장하려면 나만이 알고 있는 엉덩방아를 찧던 ‘과거’가 있어야 한다. 내면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1인칭 화자의 역할이 얼마나 큰 지 잘 보여준다.

 

 

정유경의 ‘낮달’은 위의 장영복의 시와 달리 전개되는 이야기들이 모두 외형적이다. 구름은 ‘비늘 한 조각’으로 ‘포근한 솜털’로, ‘토실한 엉덩이’로, ‘물고기 지느러미’로 나열된다. 화자의 눈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감성을 경험하게 된다는 잇점이 있지만 자칫하면 시와 독자가 서로 겉돌게 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시적 화자를 중심으로 계절평을 써봤다. 비평이라면 어디까지나 비평이어야 하지만 비평으로 그치기보다 함께 가는 또 다른 테마도 필요할 것 같았다.

창밖에 피는 으름덩굴의 작디작은 꽃을 본다. 이 꽃 지면 으름이 달릴 거라는 기대를 하며 시를 읽고, 계절평을 마친다.

 

(아동문학평론 2014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