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평 겨울호 계평>
동시에 나타난 부모 이미지의 변화
권영상
“그야 제 꿈은 하버드대죠, 엄마가 시키는 대로.”
이런 대답을 가끔 초등학생들한테서 듣는다. 정도만 다르지 중학생들에게 꿈을 물으면 한결같이 세칭 ‘명문대학’을 입에 올린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명문대학이 ‘4년제 대학’으로 바뀐다. 학생들의 꿈이라는 것이 대학에 들어가는 일이 되고 말았다. 이 꿈조차 대부분 내 의지대로가 아닌 부모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다.부모의 자식에 대한 과잉 기대는 자식으로 하여금 심리적 압박에 시달리게 한다. 그 결과 나이답지 않게도 우울증이며 결정 장애, 어린이 화병을 경험한다.
모 교육청에서 실시한 어린이들의 휴대폰에 적힌 부모에 대한 호칭 조사 결과가 나왔었다. 일부라고는 하지만 어린이들은 아버지를 ‘늑대’, ‘악마’ 등으로, 어머니를 ‘나쁜 엄마’, ‘마녀’, ‘여우’ 등으로 표현했다. 아버지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어머니마저 부정적 호칭을 쓴다는 것에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가을호에 나타난 동시 속의 어머니(엄마)와 아버지(아빠)의 이미지가 궁금했다. 과거 부계사회의 어머니상이라면 한 마디로 현모양처다. 현모양처란 ‘슬기로운 어머니이자 좋은 아내’라는 말로 전통적으로 한 남자의 좋은 아내를 뜻하는 말이다. 그 시대의 어머니는 자식에게 있어 자상하고, 인자하며 자기희생적이며 남편에게 순종적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 시대의 아버지라는 존재는 엄격하고 권위적인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자녀들과는 수평적인 대화와 소통이 어려운 사람이었고, 무뚝뚝하고 명령조의 화법을 사랑한 이가 아버지였다.
그러던 것이 가부장적 부계사회의 퇴조와 어머니 중심인 모계사회로 사회가 이동해감과 동시에 우리 동시문학의 부모 이미지도 당연히 변모했다. 그런 변모의 배경에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버드대에 들어가야 하는 ‘꿈’이 작용하고 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겠다.
1. 착한 엄마
높은 데서/ 떨어지는 꿈을 꾸었어.// 엄마가 그랬지/ 키가 크려는 꿈이라고/ 한 자 두 자/ 내 키를 재주셨지.// 밤하늘에서/ 별 하나가 떨어졌어.// 내가 말해줬지/ 너도 곧 키가 클 거야/ 한 뼘 두 뼘/ 별 키를 재주었지.
김정옥의 「나도 크고 별도 크고」 전문 (《아동문학세상》 2014년 가을호)
위 시의 엄마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형적인 착한 엄마다. ‘떨어지는 꿈’ 때문에 화자인 ‘나’가 실망할까봐 오히려 ‘키가 크려는 꿈’이라고 위로한다. 그러고는 그 말이 진실인 양 ‘한 자 두 자’ 키를 재어 준다. 이 시야말로 엄마가 자식을 대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전형이다. 이렇게 엄마로부터 위로 받으며 자란 화자는 ‘밤하늘에/ 별 하나가 떨어지’는 걸 보아도 자신이 받았던 위로를 ‘별’에게 전할 줄 안다. ‘곧 키가 클 거’라며.
지난날의 어머니라는 존재는 자식에게 세상을 따스하게 이해하는 방식을 가르치는 ‘무릎학교’와 같았다. 그것이 우리의 의식 속에 깊숙이 남아있는 ‘착한 엄마’ 이미지이다. 또한 동시가 가고자하는 궁극적인 어머니상일지도 모르겠다.
2. 두려운 존재, 엄마
그러나 경쟁 사회 속에서 숨 쉬고 있는 현실 속의 엄마는 마냥 착한 엄마로 머물러 있을 수만 없다. 현실적으로 엄마의 역할이란 것이 자식과 여유롭게 소통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높아지면서 이른바 직장여성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직장뿐 아니라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직장과 가정이라는 이중 부담을 안게 되었고, 그로인해 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 턱없이 줄어들었다. 그와 맞물려 자녀들 또한 가정이 아닌 사교육 현장으로 내몰려야 하는 비참한 현실에 놓이게 됐다.
감기몸살로 아픈 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끙끙 앓는다// 혼자서/ 아픔과 싸운다// 퇴근하려면 멀었다는 엄마/ 빨리 낫게 약 먹고 푹 자라는데/ 아픔이/ 잠을 걷어가 버렸다// 자고 싶은데/ 뒤척, 뒤척/ 끙끙 끙끙// 혼자라서 더 아픈 날/ 이상하게 슬픈 날
정진아의 「혼자라서」 전문 (《동시마중》 2014년 9.10월호)
넘어져선 안 돼// 일으켜 주기 전에 엄마가// 등짝을 때릴지도 몰라.
곽해룡의「1학년」 전문 (《오늘의 동시문학》 2014년 가을호)
위 두 편의 시에 나타난 엄마의 이미지는 전통적인 ‘착한 엄마’가 아니다. 굉장히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원인 중의 하나는 정진아의 시에 나타났듯 지금 엄마는 직장에 가 있기 때문이다. 화자인 자식이 아픈 데도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빨리 낫게 약 먹고 푹 자라’는 말밖에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더 아프고, 이상하게도 자꾸 슬퍼진다. 암만 자려고 뒤척여 보지만 나는 지금 혼자다. 나에게 있어 엄마는 너무나 먼 존재다. 이것이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만들게 하는 엄마의 현실이다.
곽해룡의 「1학년」에 나타난 엄마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언제부터일까. 자식을 잘 키우려면 자식이 쓰러졌을 때 저 혼자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학설 아닌 학설이 돌았다. 새로운 자녀 교육에 목마른 엄마들은 뒤질세라 서구의 이 낯선 방식을 쫓았다. 아니 어쩌면 이때부터 자녀가 혼자 커야하는 현실적 상황이 만들어졌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 무렵부터 ‘착한 엄마’가 독립심을 키워주는 ‘나쁜 엄마’로 변했다.
3. 놀이의 상대자, 아빠
예전의 아버지들의 위상은 대개 가정보다는 일 중심, 직장 중심 또는 친구 중심, 취미 중심적이었다. 그런 탓에 가정과 거리감을 갖게 되었다. 친근한 아버지가 되어주지 못하였고, 그러므로 가정과 자녀로부터 소외당하기 일쑤였다. 그뿐 아니라 여성들의 경제활동으로 말미암아 가정 내의 결정권을 잃어버렸고, 또한 자녀 교육의 전면에서 뒤로 물러나 앉는 형편이 되었다.
“아빠!/ 심심해/ 우리 숨바꼭질 하자”/ “그래 하자”/ 아빠가 술래 되었다.// 우리 아가 영운이,/ 꼭꼭 숨었네/ 어디 숨었지?// “나, 아가 아니야/ 다섯 살인 걸”/ 식탁 밑에서 / 큰소리가 났다.
박예자의 「숨바꼭질」 전문 (《오늘의 동시문학》 2014년 가을호)
꽁지에 불을 켠/ 배드민턴공이/ 어둠 속을 날아다니며/ 아버지와 딸 사이에 길을 낸다./ 높게/ 낮게/ 높게/ 낮게/ 낮게/ 그러나 ‘탁’/ 바닥으로 떨어지면/ “아빠 왜 그렇게 못 쳐.”/ 몰래 몰래 져주는 줄도 모르고/ “까르르 깔깔”/ 여자 아이 웃음소리가 춤을 춘다.
이화주의 「비단실길」 전문 (《오늘의 동시문학》 2014년 가을호)
자신의 취미와 직장 중심 역할 외에 아무것도 못하던 아버지들은 끝내 스스로 부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자식과 놀아주기나 하는 친구로 전락(?)했다. 그런데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성공적으로 편입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위의 박예자의 「숨바꼭질」이나 이화주의 「비단실길」에 나타난 아빠는 자식들의 좋은 놀이 파트너가 되고 있다. 자녀의 성장발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과거의 아버지들의 말투가 무뚝뚝하여 소통력이 부재했다면 이 시 속의 아빠는 ‘다섯 살 아가’가 스스로 입을 열도록 할 만큼 세련된 소통력을 가진다. 또한 아버지와 딸 사이의 소통하는 길을 ‘높게, 낮게’ 조절할 수 있을 정도다. 자기 취미 중심의 아버지가 아니라 딸에게 게임을 져줌으로써 ‘웃음소리가 춤을 추’도록 마음을 쓸 만큼 ‘좋은 아빠’가 되고 있다.
엄마라는 존재가 ‘나’의 바깥에 존재하여 아무 위안도 되지 못할뿐더러 등짝을 칠만큼 엄하고 두렵다면 이 시에 나타난 아버지는 딸과 함께 호흡을 맞추는 보다 가까운 존재다.
4. 인간적 감동을 주는 존재로서의 아버지
아버지의 방향이 직장 중심의 외부에서 가정이라는 내부로 향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버지를 소재로 하는 대개의 시들 역시 완고한 아버지가 아닌 부드럽고 친근한 이미지로 아버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런 요인에는 엄마의 지나친 교육열과 자녀 통제가 작용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받게 되는 심리적 압박을 해소하는 길을 다행히도 아버지에게서 찾았기 때문이다.
우리 아빠와 두 살 동생이/ 거실 맨바닥에서 잠이 들었다/ 아빠 배 위에 동생이 엎드리고/ 아빠는 왼팔로 동생을 안았다/ 잠이 들어도 팔을 풀지 않는다/ 아빠가 숨을 들이쉬면/ 동생이 위로 살짝 들리고/ 숨을 내쉬면 살짝 내려온다/ 아빠 숨을 참 힘도 세다/ 한 번의 숨으로/ 동생을 들었다 놨다 한다/ 동생이 아빠 심장 같다
최명란의 「동생」 전문 (《오늘의 동시문학》 2014년 가을호)
옆집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한사코/ 업으려 하고 있었다.// 아버지랑 함께/ 길모퉁이를 도는데/ “누가 보면 어쩌려고”/ “저기까지만 업혀”/ 다리를 두드리면서도 마다하는/ 할머니 앞에/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어두워지려다/ 잠시 환해져 있는 저녁 세상.// 아버지가 나에게 고갯짓했다./ 우리는 가만히 물러나/ 다른 길로 돌아서 갔다.
성명진의 「노을길」 전문 (《오늘의 동시문학》 2014년 가을호)
이 두 시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자녀에게 프렌드, 그 이상이다. 부모 자식 간에 교감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정점에 가 있다. 최명란의 「동생」에선 ‘아빠와 두 살 동생’의 거리가 완벽하게 밀착되어 있다. 마치 자궁 속에 있는 엄마와 태아와의 관계와 흡사하다. 이인동체다. 두 사람이지만 같은 몸으로 들숨과 날숨을 한다. ‘동생은 아빠의 심장’이다. 그 정도로 분리될 수 없는 사이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의 아버지다.
성명진의 「노을길」에 나타난 아버지는 친구 이상의 교육적 기능을 한다. 그건 우리 사는 인간세상이란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인간이 아름다우려면 어느 정도까지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경험하게 해주는 존재로 발전한다. ‘어두워지려다/ 잠시 환해져 있는 저녁 세상’은 ‘나’의 뇌리에 깊은 울림을 오래도록 남게 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 환해져가는 세상을 위해 짐짓 비켜가줄 줄 아는 아름다운 배려와 이해심을 아버지를 통해 배운다. 앞에서 인용한 김정옥의 시에 나타난 ‘착한 엄마’ 역할을 아버지가 대신하는 변모된 모습을 우리 동시 속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모계사회로의 이행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전통적 이미지마저 바꾸고 있다. 그 증거로 어머니(엄마)를 소재로 하는 시보다 아버지(아빠)를 소재로 하는 시의 양이 훨씬 많다는 점이다. 또한 착한 엄마를 나쁜 엄마로, 나쁜 아빠를 착한 아빠로 그 이미지를 변화시키고 있다. 인용하지 못한 시들도 대부분이 엄마 이미지를 공부를 강요하는 ‘잔소리꾼’이라든가 억압적 존재로 그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는 과거 어머니의 이미지였던 위로와 소통과 자상한 긍정적 이미지로 그리고 있다. 이 모두 엄마의 사회참여가 보편화 되었고 또 엄마가 가정교육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까 한다.
<아동문학평론 201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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