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어보는 미당 서정주
권영상
가끔 미당의 ‘애비는 종이었다’는 시 구절이 생각난다. 내가 어릴 적에는 그 말이 충격적으로 들렸다. 다른 시도 아닌 ‘자화상’이라는 시에 드러난 그의 발언이라 머릿속이 찡, 하기도 했다. 이제 미당도 가고, 미당의 시를 사랑하던 한 때도 갔다. 그런데 지금도 가끔 그 구절이 내 어릴 적의 충격처럼 떠오르곤 한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기퍼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나 꽃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갑자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도라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숯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 햇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질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언친 시의 이슬에는
멫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꺼 있어
빛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
병든 숫개만양 헐떡어리며 나는 왔다.
*읽기 좋으라고 띄어쓰기를 했음
미당의 첫 시집 <화사집> 첫 장에 실려 있는, 늘 의문을 갖던 ‘자화상’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내 인생의 8할은 바람이었다는 말도 이 시가 쓰여진 1936년 무렵에 나돌던 말이 아니었나 싶다. 1936년이면 미당의 나이는 <민음사> 시선집의 연보대로 하면 21살이고, 이 시가 말하는 대로 하면 23살이다.
어쨌거나 23살 미당을 키운 8할이 바람이었다는 말은 맞는 듯하다. 아주 우연히 내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그의 <나의 문학적 자서전>에를 보면 미당은 처음 서당과 줄포공립보통학교를 빼어난 실력으로 다녔다. 그 뒷날 15살 때 광주학생운동 주모자로 구속될 뻔했던 경험 이후로 공부에 별 마음을 두지 않고 바람처럼 떠돌았다. 불교 종정 박한영 노사를 만날 때도 마음을 잡지 못했다. 그 무렵 김동리 이용희 오장환 등과 주머닛돈 10원씩을 털어 ‘시인부락’을 만들어 찍고, 그걸 가지고 멋을 내며 으스대다가 다 내던지고 고향 고창 선운리로 내려올 때까지.
그때 미당의 부친은 그를 보고 소리쳤다.
“네 놈은 사람이 아니여. 뻘흙으로 만든 놈이지. 사람이 아니여.”
그러며 잠시 보아둔 여아와 혼인을 올려줄 때까지 미당은 정신줄을 놓은 가랑잎처럼, 머물 자리를 못 잡는 바람처럼 살았다.
이야기가 잠시 곁길로 갔다.
아니 미당의 ‘애비는 정말 종’이었나? 미당의 사생활은 모를 일이다. 다만 자화상 속의 말이니까 그렇다면 그렇겠지만 언젠가 미당이 한 이런 말이 있다. 아버지는 백百석 소지주라고. 그런 미당에 왜 자화상에다 그런 말을 담대하게 써놓았을까.
거기에는 이런 생각도 담겨 있었을 듯하다. 이 시를 쓸 1936년 무렵의 세상을 풍미하던 한 사상이 있었다. 이른바 톨스토이주의다. 모두에게 사랑을 베풀라는 평등관이 러시아 소설가 레오 톨스토이의 사상인데 그것의 실천을 위해 톨스토이는 자신의 저작권을 사회에 넘기고, 자신의 농노를 풀어주고, 그들에게 자신의 땅을 나누어 준 적이 있다. 이것이 인도의 간디 뿐만 아니라 우리 미당에게도 감염되었다. 그 당시 미당은 쓰레기통을 뒤져 넝마를 팔아 그 돈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운 적이 있었다. 어쩌면 그 때 미당은 소지주 아버지를 가진 자신과 그렇지 못한 이들 간의 평등치 못한 고뇌를 그렇게 격하한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광주학생운동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그는 나이 열다섯에 이 운동 주모자 4명 중 한 명으로 잡혔다가 나이 어린 탓에 풀려났다. 그는 그 나이에 나라를 빼앗긴 이 땅의 아버지들을 부끄러이 여겼을 것이다. ‘아비는 종이었다’란 이미 남의 속국 사람으로 사는 이 땅의 모든 영광스럽지 못한 아버지들이 처한 상황이라 봄이 옳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시 한 편이 쓰여지는 데는 이러저러한 맥락이 숨어있다. 그 맥락을 찾아내는 제 3자의 고충 또한 험난하지만 그런 정신 작용을 하게 하는 일이 시가 가진 매력이다.
그는 어쨌든지 방황 끝에 아버지가 주선해 준 정읍의 한 여자를 아내로 얻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솥작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든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닢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려고 소쩍새는 봄부터 울었고, 천둥도 먹구름 속에서 울었고, 나는 또 잠 한 숨 못 잤다는 내용이다. 억지다. 무슨 꽃 한 송이가 피는데 그리 번잡한 사정이 있을까. 세상을 그렇게 보는 것이다. 세상을 그렇게 보는데는 미당의 우주관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를 둘러싼 다른 존재들과 서로 통하는데 가 있다는 이른바 유기체적 우주관이다.
꽃 한 송이도 어떤 절대자의 손에 의해 딱 피어난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를 둘러싼 모든 요소가 서로 연동하여 피어나게 되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내가 지금 아픈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지금 아프기 때문이라는 붓다의 유기체적 연기법이 이 시속에 있다. 그러니까 국화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데도 이렇게나 많은, 소쩍새며 천둥이며 무서리며 다른 우주적 존재들의 노고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 시는 수 없이 많은 고독한 독자들을 위로하게 됐고,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시가 됐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어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것만 오히려 남았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읍디다.
시집 <동천 冬天>에 실린 ‘선운사 동구’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미당은 송사에 걸렸다. 20리 거리 밖에 사는 상습범인 장웅수라는 이가 부친 살아생전에 자신에게 돈을 받고 주기로 한 땅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땅을 내놓으라는 송사였다. 그때 미당은 고창에 내려와 그 일을 무사히 마치고 상경하기 위해 선운사 버스 정거장으로 가는 길에 들른 곳이 이 시에 나오는 막걸릿집이다. 그 댁 이쁘게 생긴 여주인과 술을 한 독 가까이 나누어 마시던 중에 육자배기 한 가락을 청했던 모양이다. 그녀가 불러주는 목소리는 별났다. 마치 짙은 애수를 띠는 이화중선李花中仙을 닮았거나 걸걸한 김남수를 닮아있어 술 한 독을 다 비우도록 입술도 맞추며 노래도 들었는데, 남편 올 시각이란 말에 서둘러 주막을 떠났다.
근데 그 후에 다시 내려와 보니 그 집은 없고 빈 파밭뿐이었다. 하도 괴이한 일이라 이웃에 물어보니 본디 그런 집이 있을 리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었다며 미당은 저의 특유의 넉살을 떨었는데 이 시가 그 시다. 자신의 시에다 그런 전설 같은 전설을 만들어 붙일 줄 아는 미당이 아름답다.
미당의 시작 노트에 의하면 ‘선운사 고랑’은 ‘선운사 골째기’로, 다시 ‘선운사 동구으로’ 고쳐지다가 끝내 ‘선운사 고랑’으로 자리를 잡았다. ‘남았읍디다’는 ‘남았습니다’보다 훨씬 구어투 말이라 ‘남았읍데다’로 할까말까 망설인 말이다. 가급적이면 토착어를 깊이 사랑해 온 미당의 시정신이 보이는 부분이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는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가수 송창식의 노래로 더 잘 알려진 시집 <귀촉도>에 실린 ‘푸르른 날’이다.
여기 나오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이면 시인이 그리워하는 그 사람은 누구일까. 초록은 지쳐 단풍이 드는데 눈물겹게 떠오르는 그 사람. 모르긴 해도 서로 죽고 못 사는 그런 사람일 듯싶다. 짤막하게 사는 인생이란 게 살아놓고 보면 살아온 일이 다 그리움이다. 후회해도 다시 못살 것이 인생이고 보면 그리움은 더욱 사람을 사모치도록 그립게 만든다.
오늘 같이 푸르른 날, 저 꽃 진 자리처럼 한 때 황홀했던 인생을 그리워해 보자는 뭐 그런 시인듯 하다. 그리운 사람 하나 가슴에 심어두고 살고 싶다는 어설픈 생각이 든다.
미당 떠난 지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15년이나 됐다.
고은 시인의 말처럼 미당이 떠나면서 우리말의 유구한 세월도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미당’이 남긴 호만은 불러볼수록 좋다.
未堂 - 써놓고 볼수록 모자라는 시라거나 생각할수록 조금 모자라는 사람- 시 만큼 서정주의 호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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