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나이에 얹힌 존재의 무게와 성숙

권영상 2015. 4. 24. 09:39

 

나이에 얹힌 존재의 무게와 성숙

권영상

 

 

 

 

나는 누구일까? 이런 명제에 대한 논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나란 정형화 된 것이 아니라 끝없이 변하는 유동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 안엔 내가 너무 많다. 그런 내가 세상과 마주 설 때 나는 당혹스럽다. 나는 어떤 나로 세상 앞에 나서서 그 세상과 마주 해야 할까.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하는 걸까에 대한 질문에 우리는 종종 직면한다.

 

 

그 까닭은 사람이란 거대한 우주 앞에, 또는 도도히 흐르는 세상 앞에 아주 미미한 존재라는 걸 자꾸 경험하기 때문이다. 세상과 부딪혀 종종 한 걸음 뒤로 물러섰던 기억들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 그런 경험들이 나를 세상과 어떤 순응적 관계에 놓으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이란 우주의 일부분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체계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걸 인지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런 경험과 인식을 통해 아프지만 나를 이루어 간다. 나를 이루어가는 데는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나를 하나하나 억제하거나 다스려가는 아픔이 필요하다. 이 일을 성장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성장은 세상과 부딪히면서 자신의 욕망과 갈등을 일으키는 내적 고통을 수반한다. 그 배경에 세상의 규칙과 관습과 가치와 합치해가려는 존재의 의지가 숨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아동문학은 성장의 문학이며, 동시에 성숙의 문학이다. 몰라보게 자라나는 몸의 활동성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적 발육을 고양하는 문학이다. 내적인 성숙은 육체적인 성장과 분리될 수 없다. 이 성장의 대표적인 지표가 나이이다. 사람은 늘 성장하지만 때로 나이를 통해 성숙하기도 한다.

 

 

 

1. 나이의 무게

 

 

 

내가 방을 치우면 당연한 거지/ 동생은 만날 어리지/ 어지르지/ 알랑거리지/ 그래도 천사 같다지// 그러려니 하다가 화가 치밀지/ 울쑥, 그래봐야 나만/ 불쑥, 화내봐야 나만/ 못난이지/ 못난 언니지// 오늘도 나는 천사는 못 되지/ 혼자 방이나 치우지/ 설거지나 하지/ 엄마 없을 땐/ 알랑이는 동생이나 쥐어박지

 

-장영복의 「천사는 못 되지」전문 (《동시마중》 2015년 3. 4월호)

 

 

참새가/ 나뭇가지에다/ 입을 닦는다// 집에 가면/ 동생이/ 뭐 먹었어? 하며/ 달려들어/ 입을 벌려 볼까 봐// 참새는/ 모이를 먹고/ 집에 들어가지 전/ 꼭/ 나뭇가지에다/ 먼저/ 입을 닦는다

 

-이동진의 「참새」 전문 (《동시마중》 2015년 3. 4월호)

 

 

 

장영복의 시 「천사는 못 되지」에서 화자가 지향하려는 세상의 보편적 가치는 ‘천사’다. 이 시의 내용으로 보아 천사란 좋은 사람이다. 우리 시대 사람들이 말하는 동생과 원만한 관계를 맺는 좋은 형이거나 언니를 말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천사는커녕 ‘못난이’다. 그건 만날 방을 어지르고, 부모에게 알랑거리는 화자의 ‘동생’ 때문이다. 그 동생 때문에 나는 당연한 것처럼 동생이 어지른 방을 치우고, 또 설거지를 해야 한다. 불쑥 화가 치밀어도 참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니 엄마가 없을 때에나 한 대씩 쥐어박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 내가 형이기 때문이다. 형이라는 나이 때문에 나는 나를 억누르며 못난이로 사느라 끙끙댄다. 나는 그렇게 내적 변화를 겪으며 성장한다.

 

 

 

장영복의 시가 외부를 향한 발설이라면 이동진의 「참새」는 내적 은밀함과 자제력을 갖추고 있다. 형 참새는 뭘 먹고 집에 들어가면 혼자 먹고 다니느냐며 떼를 부리는 동생이 싫어 꼭 입을 닦는다. 장영복의 「천사는 못 되지」보다 분명 나이가 서너 살 위다. 동생과 함께 나누어 먹기를 싫어하는 못 된 형의 이야기가 아니라 형도 때로는 동생 몰래 혼자 먹고 싶을 때가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함께 나누어 먹는’것이 보편적 형의 모습이라면 성숙의 시기로 가는 길에는 ‘혼자 먹고 싶은’ 욕망과 갈등할 때도 있다. 이때 책잡히지 않기 위해 자신이 한 행위를 스스로 단속하는 형의 반듯한 행동거지가 내밀하다. 참새를 의인화하는 재치가 놀랍다.

 

 

 

2. 아름다운 성숙

 

 

엄동수도 곧 열한 살, 나무와 친하게 되었다/ 달나라에 사는 엄마와 지구에 사는 아빠의 기둥이 될 나이가 되었다// 엄마가 보고 싶거나 아빠에게 야단맞는 날이면/ 밥을 먹지 않거나 이불 뒤집어쓰고 음매음매/ 염소처럼 우는 게 전부였지만// 엄동수도 이젠 열한 살, 슬픔이란 걸 알게 되었다/ 엄마와 아빠 잔소리에서 벗어나 내가 나를/ 꾸중할 나이가 되었다// 뒤뚱뒤뚱 오리궁둥이 선생님에게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지만 내가 먼저 참아야지/ 못이기는 척 할 수 있게 되었다// 엄동수도 이젠 열한 살, 시골 할머니가 키우는/ 염소에게 게임기 갖다 주고 으흠!/ 수염을 빌릴 나이가 되었다.

 

 

-김륭의 「염소에게 수염을 빌리다」 전문 (《동시마중》 2015년 3. 4월호)

 

 

새끼손가락 하나에만/ 꽃물 들인 여자아이// 어젯밤 내가 읽은/ 아, 그 시집을 들고 있네!// 눈 아래/ 주근깨 몇 낱/ 별꽃보다 더 곱다.

 

 

-송재진의 「그 아이」 전문 (《열린아동문학》 2015년 봄호)

 

 

 

두 시를 읽노라면 사람이 어떻게 성장하여 어른이 되어 가는지, 어른이 된다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이 실은 얼마나 힘든 노정이었는지 알게 된다.

김륭의 「염소에게 수염을 빌리다」는 시 바깥에 있는 누군가가 시 속의 인물 엄동수를 바라보고 있다. 그가 아내를 ‘달나라’에 보낸 엄동수의 아버지라고 말해도 괜찮겠다. 그 아버지가 철없는 아들이 나이에 맞게 자라주기를 염원하고 있다.

엄동수는 어떤 인물인가. 아빠에게 야단맞으면 염소처럼 음매음매 우는 철부지다. 그 철부지 엄동수가 어른스럽기를 바라는 지점에 열한 살 나이가 있다. 나이를 한 살씩 먹을 때마다 엄동수도 나이의 무게를 느끼길 바란다. 아버지는 열할 살 아들이 ‘슬픔’이란 걸 알기를 바란다. ‘내가 나를 꾸중할 나이가 되’기를 바란다. 선생님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지만 내가 먼저 참’기를 바란다. 그리고 ‘게임기’를 손에서 놓고 ‘수염’의 나이만큼 의젓하기를 바란다.

자의든 타의든 이제 엄동수는 자신이 처한 가족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엄동수가 짊어져야할 열한 살 나이의 무게다. 인간이 성숙해 가는 길에는 아픔이라는 그림자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사람은 그런 아픈 성장을 통해 송재진의 「그 아이」에 이르는 게 아닐까 싶다. 「그 아이」의 화자인 ‘나’는 길에서 여자아이를 만난다. 나는 그 여자아이에게서 새끼손가락 하나에만 꽃물을 들인 것을 본다. 그 여자아이에게서 간밤에 내가 읽은 그 시집을 들고 있는 걸 본다. 물론 이 시에는 없지만 시 속 화자도 새끼손가락 하나만 꽃물을 들였다. ‘나’는 그 순간 그녀와 동류의식을 느끼면서 그 여자아이에게 빠져든다. 눈 아래 주근깨가 별꽃보다 더 곱게 보일 만큼.

이런 배경에 화자의 성숙한 내면의 아름다움이 숨어있다. 주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꽃물이며 시집이라는 제법 근사한 문화적 장치를 해놓은 의도가 조금 작위적이긴 해도 주근깨를 별꽃으로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기까지 어떤 삶을 가져야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아이가 성장해 어느 순간 이성에 눈을 뜨는 장면을 그린 시조다. 시의 품격을 보는 듯 아름답다.

 

 

3. 사람이 되는 일

 

 

 

엄마한테 꾸중을 들었다/ “사람 좀 되어라”/ 나는 아직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할머니는 나를/ 강아지라 부르는 걸까// 나는 그렇다고 치자/ 삼촌은 뭔가?/ 오늘도 끌끌 혀를 차시며/ 할아버지 하시는 말씀/ “저거 언제 사람 되려나”

 

-윤제림의 「삼촌도 사람이 아니다」 전문 (《동시마중》 2015년 3. 4월호)

 

 

사춘기 형 같다고 해야 하나,/ 미운 일곱 살 동생 같다고 해야 하나,/ 암튼 그랬대요/ 엄마 눈에 아빠는요// 고분고분 말 잘 듣는 범생이 같다고 해야 하나,/ 사탕 물린 애 같다고 해야하나,/ 암튼 그렇대요/ 엄마 눈에 아빠는요// 지금 우리 아빠/ 새 장난감에 푹 빠져 있거든요/ 오늘도 회사 마치자마자 집에 와서/ 기타를 갖고 놀고 있어요// 때로는 어른들도 장난감이 필요한가 봐요

 

-김자미의 「어른들도 때로는」 전문 (《열린아동문학》 2015년 봄호)

 

 

 

사람이란 두 발로 직립하는 존재이며, 언어라는 소통의 도구를 가지며, 문화라는 것을 향유하며, 생각할 줄 알며, 웃을 줄 아는 동물, 이게 사전에 나타난 ‘사람’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개념은 사람이 동물이라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동물적 존재가 점점 성장하고 성숙하여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앞의 시, 윤제림의 「삼촌도 사람이 아니다」는 ‘사람 좀 되어라’에서 시작한다. 1연의 화자인 ‘나’는 엄마와 할머니와의 관계망 속에 있다. 어리고 미숙한 나는 이미 성인이 된 엄마와 할머니가 보시기에 사람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사람’이라는 개념에 빗대면 부족하다. 그런 이유로 화자는 할머니의 말을 빌려 스스로를 ‘강아지’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자신은 비하해서 받아들여 놓고 보아도 여전히 남는 ‘사람 되기’에 대한 의문이 있다. 2연에 등장하는 삼촌 때문이다. 삼촌은 분명 화자보다 나이 많은 인물로 아버지와 같은 반열이다. 근데 그를 바라보며 못마땅해 하는 이가 있다.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늘 삼촌을 보고 언제 사람 되냐고 질타한다.

그렇다고 하여 ‘나’나 2연의 ‘삼촌’은 사람으로 부족한 인물인가? 아니다. 그들보다 높은 연배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언제 사람이 되려나’라는 여지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사람은 그처럼 주변 사람들과의 불화와 갈등을 통해 성숙해 간다.

 

 

 

김자미의 「어른들도 때로는」은 ‘-같다고 해야 하나’, ‘-그랬대요’, 또는 ‘엄마 눈에 아빠는요’라는 반복 어구를 통해 시를 쉽고 멋지게 끌어가고 있다. 아빠가 철부지 같은 이유에 대한 즉답을 피하면서 어느 선까지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절제의 미덕도 보여준다. 그 절제의 선이란 내가 아닌 엄마의 눈으로 보는 아빠다.

아빠에겐 아빠의 나이가 있다. 아빠는 아내인 엄마와 자식인 나와의 관계망 속에 있다. 아빠는 가정 밖에서 절대로 사춘기 형 같은 모습으로 살지 않는다. 일곱 살짜리 나이로, 범생이 같은 나이로 살지 않는다. 아빠는 가정이라는 관계망 속에 들어올 때만 일곱 살짜리 아이가 된다. 그것이 가정을 지키는 아빠가 먹은 ‘아빠의 나이’다. 이 시속의 엄마나 나나 아빠가 미운 일곱 살 같아 보인다는 이유로 갈등하지 않는다. 오히려 행복해하고 있다. 앞의 시 ‘사람 좀 되어라’의 사람이 되는 일에 대한 대답을 어쩌면 이 시속의 아빠가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사람은 세상과의 관계를 통하여 성장하고 또 성숙하는 존재다. 성숙에 이르는 데에는 갈등이 필요하며 능동적인 순응이 요구된다. 관계망 속에서 가장 자기다운 순응이.

 

<2015년 아동문학평론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