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의 확장이 진부한 시를 살린다
권영상
시야의 확장은, 확장한 만큼의 세계를 소유하는 특성이 있다는 말이 있다. 경험적 자산이 커진다는 뜻이다. 사람은 태어나 엄마 품이라는 특정 영역 안에서 보호받으며 성장한다. 그러면서 간헐적 정보를 통해 새로운 세계가 엄마 품 바깥에 있다는 낌새를 알게 된다. 경이로운 일이다. 반복하여 대하는 낯익은 인물이나 낯익은 사물이 아닌 새로운 세계의 발견. 그때로부터 사람의 시야는 가정이라는 울타리 바깥을 지향하게 되면서 점차 넓은 세계와 관계 맺으며 성장한다.
동시가 좀 살아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그 답을 시야의 확장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동시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문학이라 해서 그 소재를 특정한 영역 안에서만 찾는다거나, 그 주제를 지나치게 어린이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 안으로만 한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독자는 늘 그렇고 그런 유사한 비빔밥 문학에 금방 질려버릴 것이다. 독자의 수용력만 지나치게 배려한다는 명분으로 그런 시를 써야한다면 시인 또한 존재성을 잃고 말게 될 것이다.
1. 시간의 거리 확장
시간은 언제나 현재다. 물리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과거로 되돌리는 일을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만은 다르다. 기억이라는 장치가 있다. 인간은 기억을 통해 시간의 지평선 너머로 되돌아갈 수 있다. 과거라는 시간성을 잘 다루면 현재 속에서 갈등하는 문제를 쉽게 치유할 수 있다. 과거는 단지 과거만이 아닌 이유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이모/ 꽃 한 다발을 안고/ 시댁에 인사하러 갔습니다.// 어른들에게 큰절 올리고/ 과일을 내려오려는 시어머님을 따라/ 이모가 부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뒤에서/ 시어머니 허리를 안고 말했답니다.// “없는 집에서 시집왔는데 어머니,/ 며느리로 받아 주어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어머니 눈에 나지 않게/ 최선을 다하고/ 잘 살겠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뒤돌아서/ 말없이 이모를/ 꼭 안아 주었답니다.
-구용의 「착한 우리 이모」 전문 (《시와 동화》 2014년 겨울호)
과거로 가려면 지독히 아주 먼 과거로 가 있어야 한다. 1960년대쯤이라는 오래된 과거를 본다는 점에서 우리의 의식은 잠시 시간여행에 빠진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이모가 시집살이가 두려워 무섭다는 시어머니를 껴안고 눈에 나지 않게 잘 살겠다고 고백하자, 시어머니가 오히려 그를 껴안아 주었다는 에피소드가 이 시 속에 있다. 이 에피소드가 말하려는 것은 가장 첨예한 두 인물의 갈등 해결 방식이다. 이쯤 되면 이 시가 왜 세상 바깥으로 나왔는지를 이해할만 하다. 시인은 오랜 기억속에 남아있는 두 분의 아름다운 화해를 통해 극한 갈등으로 치닫는 현실에 대안을 제시하려는 낌새를 느끼게 한다. 진부하긴 하지만 시간의 충돌에서 오는 아득함의 충격도 있다.
설겅주 넘으면 새별/ 병승이네 갑윤이네/ 까치고개 넘어 방앗간/ 공동묘지 상엿집 지나 종수 승표네 뒷골/ 그 너머 더 가면 으싱이/ 하늘에서 물고기가 쏟아지는 현석이네 으싱이// 뒷동수 널다리 건너 늘게미/ 웃말 아랫말 태영이네/ 느림싱이 삿갓논 팔밭 한 뼘 비도골/ 더 가면 되목 늘티 창식이 병조네/ 딸바위 아들바위 마전사 도장골 호름밭골// 정문께 고개 넘어 사당마루/ 사당마루 지나 것더리, 것더리 너머 거쿠리........
-김사인의 「친구네」 앞부분 (《동시마중》 2015년 1. 2월호)
마치 항목이 많은, 뉘여놓은 막대그래프를 보는 듯하다. 화자가 알고 있는 친구네 집을 모르기는 해도 가까운 데서 먼데로 확장해 가며 열거해놓은 시다. 화자의 집을 중심으로 새별에 있는 갑윤이네서부터 가장 먼데 사는 가래울 종관이 집까지 소개하는 형식이다. 그러니까 시인의 공간적 촉수가 방사형으로 확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새별’이니 ‘까치고개’, ‘뒷골’, ‘으싱이’, ‘늘게미’, ‘느림싱이’, ‘비도골’, ‘늘티’, ‘호름밭골’, ‘것더리’, ‘거쿠리’, ‘사실’, ‘시승골’, ‘쇠실’, ‘가래울’ 등의 낯설지만 순수한 우리말 지명의 친근감이 있다. ‘하늘에서 물고기가 쏟아진다’는 상상력, ‘방앗간’, ‘공동묘지’, ‘상엿집’이니 ‘딸바위 아들바위’ 등의 정서적 지형물과 입안에 도는 운율이 잘 조합된 시다.
낯설면서도 왠지 동시에 대한 의문이 드는, 그러면서도 잊혀진 우리 문화를 발견해가는 기쁨이 있다. 그 기쁨이란 순우리말 지명이 풍기는 치유의 힘 때문이 아닐까.
2. 공간의 거리 확장
인간의 공간 이동에 대한 욕구는 이주와 여행 등의 방식으로 발전한다. 여행의 내면엔 고정된 공간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낯익은 공간의 진부함을 누구보다 빨리 느끼며, 새로운 환경과 대립하는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행자는 그 무엇을 향해 나아가려는 방향성을 지닌다.
여행을 떠났지/ 옷장 위 배낭을 꺼낼 만큼 키가 컸으니까/ 낯선 나라의 수도와 지명을 외우고/ 그곳의 풍습과 인사법을 공부하고/ 새와 나무의 이름을 알아내고/ 수많은 풀들을 관찰하고 연구했던 나날들// 여행을 떠났지/ 옷장 위 배낭을 꺼낼 만큼 키가 컸으니까/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 무슨 말을 나누게 될까/ 나 같은 또 다른 누군가를 사귀게 될까/ 설레었던 나날들/ 어려움에 처한 할아버지나/ 우물물을 떠 달라는 노파에겐/ 반드시 친절을 베풀리라 결심하면서// 여행을 떠났지/ 옷장 위 배낭을 꺼낼 만큼 키가 컸으니까// 어디 어디 갔었느냐고?/ 무엇을 보았느냐고?//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내게 더 높은 옷장 위 배낭이 또 있으니까// 여행을 떠날 거야/ 더 높은 옷장 위 배낭을 꺼낼 만큼 키가 크면
-송선미의 「옷장 위 배낭을 꺼낼 만큼 키가 크면」 전문 (《동시마중》 2015년 1. 2월호)
왜 여행을 떠나는가? 거기에 대한 답이 이 시 안에 있다. ‘옷장 위 배낭을 꺼낼 만큼 키가 컸으니까’가 그 이유다. 특정 영역에만 사는 사람일수록 낯선 나라의 지명을 외우고, 낯선 풍습을 익히고, 낯선 인물과 만나는 걸 꺼려한다. 그 자체가 낯선 세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두려움과 긴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고치 속에 안주하는한 나비로 날아오를 수 없다. 몸이 안주하려는 공간보다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간의 이동은 필연적이다. 공간 이동은 어린이 독자들의 가장 큰 특성으로 끝없이 새로운 세계와 접하려는데 있다. 동시가 특정 공간 안에 갇혀있을 때 시는 진부해지며 독자로부터 외면받는다.
새파란 하늘-/ 저 먼 남쪽 산 너머에서/ 내가 선 북쪽 하늘까지/ 흰 구름이 한 줄/ 그어져 있다// 자세히 보니 깃털이구나/ 붕의 꽁지깃이구나/ 꽁지깃의 8분의 1쯤 되겠구나// 《장자》라는 책은 이렇게/ 이야기의 문을 연다//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다. 그 이름이 곤이다. 크기가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해서 새가 되는데, 이름이 붕이다.......중략 ....... 지금쯤 붕의 등은/ 태평양에 걸쳤겠다/ 머리는 아르헨티나를 지나/ 지구바깥을 바라보겠다// 너무나 커/ 들을 수 없는 소리// 너무나 커/ 보이는 것이 머리인지/ 꼬리인지도 알 수 없는 구름이/ 붕붕,/ 붕붕
-이안의 「구름 붕붕」 부분 (《어린이책 이야기》 2014년 겨울호)
‘나’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길게 난 구름 한 줄을 보며《장자》라는 기원전의 고전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게 이 시의 시야의 확장이다. 구름 한 줄에서 장자의 붕새를 떠올려내는 상상력의 확장과 그와 더불어 독자들 또한 상상 공간을 넓혀간다는 점이 바로 시의 힘이 아닌가 한다. 독자는 너무도 먼 그 시간대를 상상해내는 즐거운 고통을 맛본다. 그뿐만이 아니다. 붕새는 얼마나 크길래 등은 태평양에 걸쳐 있고, 머리는 아르헨티나를 지나 지구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하는 공간 상상의 기쁨도 맛 보게 된다. 이 어마어마하게 큰 붕새를 상상해내는 고충도 여간한 즐거움이 아닐 것이다.
‘구름’은 누구나 흔히 다루는 일상 언어이다. 그러나 거기에 어떤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주느냐 따라 먼 고전의 세계로 안내하는, 일상성을 뛰어넘는 시의 언어가 될 수 있다.
3. 관념의 거리
사물은 매 순간 변화한다. 변하지 않는 실재란 없다. 우리가 인식하는 실재란 극히 짧은 한 순간에 얻어지는 것으로 그것 역시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이 어제의 세상임에도 오늘은 새롭다. 많은 이들이 아직도 시를 간절히 원하는 까닭은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진부한 세상보다 더 새롭고 경이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서이다.
나는 흰 쌀밥에 국어국, 잘 익은 도덕김치, 새콤한 과학초무침, 짭조름한 수학젓갈, 얼큰한 사회탕, 매운 실과볶음, 시든 자연샐러드, 느끼한 영어튀김, 너무 빨리 녹는 체육맛아이스크림, 콩나물 음악무침, 물감 미술범벅을 먹고, 간식으로 뚱땅뚱땅 피아노피자, 이얍! 태권도샌드위치, 꾸버꾸벅, 바둑초콜릿.... 핫! 뜨거운 컴퓨터감자와 한문국수를 호로록 해치운 다음, 짭조름한 수학젓갈, 느끼한 영어튀김을 또 먹고, 복습주스, 예습사과, 파김치숙제를 꾸역꾸역 먹는다. 거의 날마다 이만큼 먹는다. 배불러서 빵! 터질 것 같다. 소화는 언제 시키나? 똥 눌 시간이 없다. 불어터진 일기도 먹어야 하는데...꾸벅, 벌써 잠 온다. 꿈속에서 달콤한 게임사탕이나 실ㅋㅓㅅ ...
-나비연의 「내 밥상」 전문 (《동시마중》 2015년 1.2월호)
화자인 나는 온갖 공부에 시달리느라 똥 눌 시간조차 없다. 그래서 밤이면 잠에 시달린다는 뻔한 공부 이야기다. 많은 시인들이 과잉 공부에 시달리는 현실을 고발해왔다. 그러나 이 시의 고발 방식은 독특하고 재미있다. 국어를 국어국, 도덕을 도덕김치, 과학을 과학초무침 등으로 그 실재를 음식으로 바꾸어 비유하고 있다. 과잉 공부를 과잉 식사로 바꾸어놓음으로써 ‘배가 터질 것 같다’는 비명이 더욱 절박하게 들린다. 실재하는 대상으로부터 먼 거리에 놓여있는 관념을 차용했을 때 시는 신선하게 살아난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새가 그려진/ 도화지 한 장이 떨어져 있다// 찬 바람이 불 때마다/ 새는 날고 싶어/ 펄럭펄럭 날갯짓을 한다// 휘-익/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새는 재빠르게/ 도화지를 빠져나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저기, 시린 하늘에/ 하얀 새 한 마리 떠간다.
-하청호의 「하얀 새」 전문 (《아동문학평론》 2014년 겨울호)
시의 제목이 하얀 새다. 낯선 제목 때문에 그게 예사의 새가 아니라는 걸 독자는 긴장감을 가지고 살필 것이다. 하얀 새란, 새 그림이 그려진 도회지이며. 좀더 상상력을 확장해보는 독자라면 운동장에 떨어진 연이 되겠다. 쉽게 말하면 연이 바람을 만나 하늘로 날아올랐다는 내용이다. 이 뻔한 내용은 도화지에 그려진 새가 도화지를 빠져나와 하늘로 날아올랐다는 상상력이 이 시를 살린다. 거기에 시인의 관념적 인식이 개입한다. 이럴 때의 인식의 거리란 실재로부터 멀어질수록 새롭고 신선하다.
시의 확장은 독자의 인식의 거리를 넓힌다. 무엇보다 시가 특정한 영역에 안주하려는 것보다 그 범주를 깨고 뛰쳐나올 때 외부세계에 대한 지향성을 갖는다. 그것은 동시에 시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며, 시를 낯설게 함이며, 시를 살아나게 하는 방식이다.
<2015년 아동문학평론 봄호 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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