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도 욕망은 있다
권영상
아이들에게도 욕망은 있다.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놀고 싶은 욕망이다. 아니 그런 본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은 자녀의 노는 시간을 두고 보려 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공부, 또는 공부와 관련된 일을 강요한다. 어쩌면 지금, 2015년 우리 시대 부모들의 가장 거대한 가치는 ‘공부’일지도 모른다. 공부만이, 좋은 성적만이 행복을 얻는 절대적 수단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이런 세속적인 가치는 여과 없이 자녀에게 투여되고, 자녀들은 우리 사회의 획일적이고도 왜곡된 과잉학습이라는 틀 속에서 규정된 삶을 반복하고 있다. 실제로 모신문사에서 학습 시간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초등학생은 휴일까지 계산하여 하루 평균 5시간 23분을 공부한다. 대학생보다 더 많이 공부하며 학교외(학원)에서 공부하는 시간은 2시간 14분이다. 이들은 밤 10시 40분이어야 비로소 취침한다. 수면 시간을 빼면 하루 종일 공부에 매달리는 편으로 부지런해 보이는 듯 하지만 매우 비생산적인 부지런함에 짓눌려 있다. 이러한, 투자하는 시간에 비해 능률이 떨어지는 비경제적인 부지런함의 강요야말로 현실로부터 벗어나려는 아이들의 욕망을 부추긴다.
공부 또는 일의 또 다른 한 축에 노는 일이 있다. 노는 일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아이들은 공부 이외의 것에서 항상 격리되고 있다. 노는 일, 논다는 것은 비생산적 부지런함과 달리 창조적인 부지런함이며 생명성을 주체적으로 회복하는 행복한 잉여문화다. 그 점을 간과하지 않은 일군의 시인들이 이번 여름호에 있었다.
1. 비생산적인 부지런함
자녀가 노는 걸 참아내는 부모가 몇 있을까. ‘노느니 아무거나 위인전 하나 꺼내 읽으라’는 부모들이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아무 효율성도 없는 부지런함은 노는 것만 못하다. ‘논다’는 어떻게 놀 것인가를 항상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창의적이다.
놀아도 먹어도는/ 가도 가도 또 가고 싶은 섬// 외로워도 슬퍼도는/ 영영 안 가고 싶은 섬// 학교도 학원도는/ 졸려도 아파도 가야하는 섬// 수업도 시험도는/ 몰라도 앉아서 풀어야 하는 섬.
김은영의 「섬타령」 전문 (《동시마중》 2015년 5. 6월호)
우리 엄마가 달라졌어요//학교 갈 때는/ -가서 놀아라 놀아!/ 아이들이 놀아야 학교가 산다// 학원갈 때는/-꼭 가야만 하겠니? 아이들이 놀아야 마을이 산다// 숙제할 때는/-머리 터진다 터져! 아이들이 놀아야 도시가 산다//일기 쓸 때는 /-맨날 쓸게 무어 있니?/ 아이들이 놀아야 나라가 산다// 우리 엄마가 달라졌어요
서정홍의 「꿈속에서」 전문 (《동시마중》 2015년 5. 6월호)
위의 두 시는 모두 놀기를 바라는, 놀기를 염원하는 그런 내용이 시 속에 있다. 우리의 사회 교육적 현실이 우려스러울 만큼 모두 공부에 가 있기 때문이다. 김은영 시의 화자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공부라는 학습과 직면해 있는 아이이며, 서정홍 시의 화자는 공부하기를 극구 말리는 생각 있는 어른이다.
김은영의 시는 제목 그대로 뒷말에 ‘-도(島)’가 붙는 ‘섬타령’이다. 섬 중에서도 ‘놀아도’와 ‘먹어도’는 가 보고 싶은 섬이다. 그러나 ‘학교도’나 ‘학원도’는 피곤하고 몸이 아파도 갈 수밖에 없는 고달픈 섬이며, ‘수업도’와 ‘시험도’는 문제해결력이 없어도 끝종이 날 때까지 참고 앉아서 풀어봐야하는 피곤한 섬이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교육현실을 비꼬아도 묵묵부답인 것이 우리 사회다. 공부 이외에서 대안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우리 사회가 경직되어 있다는 뜻이다. 졸려도 아파도 가야하는 곳이 학교이고, 몰라도 계속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비생산적인 부지런함을 요구하는 시험이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이 ‘부지런함’이라는 미덕에 사로잡혀 지루하고 고단한 삶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각행의 끝에 ‘-는’과 ‘섬’이라는 각운을 배치하여 자칫 현실 고발시가 빠질 수 있는 뻔한 이야기의 함정을 피하고 있다.
서정홍의 시는 ‘꿈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꿈속 이야기다. 꿈속 이야기답게 시속에 나오는 엄마와 아이들의 대화가 확 바뀌었다.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몰던 엄마가 아이들이 놀아야 학교가 살고, 마을이 살고, 도시가 살고, 나라가 산다며 아이들의 공부하기를 걱정하며 만류한다. 이 시에서 보다시피 엄마가 바뀌면 학교가 바뀌고 나라가 바뀐다. 교육을 바꾸는 일은 어찌 보면 ‘엄마’에게 있다는 걸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시 역시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아이들이 놀아야 -가 산다’는 반복 어구와 점층법을 사용하여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이 두 시가 놀기를 강조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울 수 있고, 사회적 관계를 스스로 깨우치게 하고, 인간적 성품을 만들어내는 길이 놀기라는 문화 안에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2. 내게는 나의 길이 있다구
오빠, 빨리 가자/ 학교 늦겠다// 그래도 오빠는/ 길가의 민들레를 들여다 본다./ 오빠, 어서 가자/ 선생님에게 혼난다.//그래도 오빠는/ 또 개미를 따라간다.// 오빠, 니 맘대로 해라/ 나는 모른다.// 동생은 저만치 혼자 가다가/ 다시 돌아온다.
이상국의 「학교 가는 길」 전문 (《동시마중》 2015년 5. 6월호)
바다가 되기 싫은/ 물이 있지// 가던 발길 멈추고/ 고요히// 생각에 잠기는/ 물이 있지// 세상 물들이 모두/ 바다로 갈 때// 나무 속으로 들어가/ 팔 벌리고 서 있는 물이 있지// 잎으로 꽃으로 피는/ 물이 있지
김금래의 「서 있는 물」 전문 (《어린이 책이야기》 2015년 여름호)
두 시엔 남들 모두 가는 길을 거부하는 그 누군가가 있다. 남들이 다 가는 길이란 언제나 편하고 안전하고 빠르다. 현실의 속사정을 일찍 간파한 사람들은 대개 그 길을 쉽게 가서, 끝내는 세속에서 말하는 성공에 이른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미 간 길은, 어른들이 안내해주는 그 안전한 길은 누군가에게는 이상적인 길일지 몰라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있어 그 길은 단조롭고 활력 없는 길이다. 위의 이상국의 시 속에 나오는 ‘오빠’는 누구나 다 가는 학교에 흥미가 없다. 학교란 길가에서 만나는 민들레나 개미보다 싫은 곳이다. 단순히 학교 부적응아라고 단정 지을 것이 아니라 그에겐 자신만의 관심거리가 있다.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고, 그래서 ‘우리와 다른 아이’로 낙인찍히는 학교가 싫기 때문이다. 학교생활을 적극적으로 하고, 공부도 남부럽게 하는 아이가 아닌 굳이 이 시절, ‘오빠’에 눈길을 주는 시인의 마음이 착하기만 하다.
김금래의 시는 짧으면서도 명쾌하다. 생각의 가지를 다 쳐버린 단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겨울나무 같은 것, 아픈 충격 같은 것이 그 시에 있다. 시 속엔 모두 바다를 향하는 세상의 물들이 있고, 그런가 하면 다들 가는 그 바다가 아닌 다른 길로 가는 물이 있다. 바다로 가는 물의 길은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 주기만 하면 목적지에 이르는 쉬운 길이다. 그런가 하면 ‘나무나’ ‘꽃’이 되려는 물은 그들 물과 달리 수직 상승해야 하는 고난이 있다. 그 길은 시간이 걸리고 불편하고 두려운 길이기도 하다.
바다에 이르려는 이들은 트리나폴로스의 ‘꽃들에게 희망을’ 처럼 대열에 합세하여 남의 어깨를 짓밟으며 밀치며 그 끝에 이르고자 한다. 그래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소란스러운 행렬에서 조용히 벗어나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길을 자신만의 눈으로 바라볼 줄 아는 힘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노는 일, 그러니까 무언가를 다르게 바라볼 여유를 갖는 일종의 창조적인 놂에서 온다. 그 놂을 통해 물은 세상을 향기롭게 하는 꽃이 된다. 비생산적인 부지런함에서 벗어나 놀기를 바라는 것이 거기에 있다.
3. 노는 것이 사람을 살린다
민들레 씨앗이 소풍 갑니다.// 하얀 보풀 날개 하나/ 몸에 달고서/ 홀가분 홀가분 날아갑니다.// 어디로 가니/ 먹을 건 좀 챙겨 가니/ 하고 물으면// 그런 건 몰라요./ 하지만 걱정 마요./ 거기에도 친구가 있을 거니까.
정유경의 「민들레 소풍」 전문 (《시와동화》 2015년 여름호)
콩반장이 나왔다.// 콩자반을 콩반장이라 부르는 민호에게/ 콩반장이 아니라 콩자반이라고 몇 번 고쳐주었는데/ 콩으로 만든 음식은 콩이 대표니까/ 콩이 반장 맞다고/ 콩반장 편을 반장 동희가 들고부터 아이들은/ 콩자반을 콩반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콩자반일 때는 별로 먹지 않더니 콩반장, 콩반장! 하면서 잘 먹었다.// 역시 반장은 어디서나/ 먹힌다.
임복순의 「콩반장」 전문 (《동시마중》 2015년 5. 6월호)
유한한 인생이라는 이유로 삶조차 무겁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너무 경건하게 살기는 바라는 것도 옳지 않다. 아무리 인생살이가 무게 있고 경건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 일을 가볍고 재미있게 살아내는 이의 인생이야말로 행복하다. 아이들의 인생에, 단지 먼저 살아본 경험과 지혜를 알려준다며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 또한 위험한 일이다.
위의 정유경은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가는 민들레 씨앗의 일을 ‘소풍’이라고 말한다. 심각하게 보기보다 노는 것쯤으로 보는, 세상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다르다. 미지의 세계로 나가는 존재들은 우리의 관념과 달리 홀가분할지도 모른다. ‘어디로 가니/ 먹을 건 좀 챙겨가니’하고 걱정하는 어른과 달리 ‘거기에도 친구가 있을 거니까’ 라고 대답하는 이 낙관과 긍정의 힘을 갖는 존재가 바로 아이들이다. 어른들의 우려와 달리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놀이’를 물었을 때 대부분이 컴퓨터 게임, 음주, 흡연을 들었다는 점을 보아도 ‘노느니 아무 책이나 읽으라’ 는 공부 중시성 간섭은 그들을 너무 무시하는 처사다.
임복순의 「콩반장」엔 사람의 생명성을 억누르는 공부가 아닌, 사람을 살리는 놀이가 들어있다. 아이들은 어른이 보기에 아무 놀 것도 아닌 ‘콩자반’ 하나를 가지고 논다. 이 시의 교실엔 콩자반을 콩반장이라 부르는 민호가 있다. 이게 놀이가 되는 것은 기존 사물의 이름을 아이들식대로 바꾸는데 있다. 바꾸는 건 재미있다. 아버지를 개구리로, 염소를 멸치로, 대통령을 3통 2반 반장으로 바꿀 때부터 놀이는 시작된다. 무엇보다 콩자반을 잘 먹히는 콩반장으로 바꿀 때 그 호응과 흥분과 공감도가 높아진다. 이 시의 묘미는 ‘콩자반’ ‘콩반장’이라는 반복어의 재미뿐 아니라 ‘먹다’의 다의성에도 있다.
노는 것이란 어른의 관리감독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누리려는 아이들의 삶의 한 행위다. 노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데엔 오랜 과열 교육의 악습이 있다. 좋은 성적만이 일류대학 입학을 가능하게 하고 그게 성공을 쥐는 열쇠쯤으로 여겨온 행복이라는 등식 때문이다. 그러나 일군의 시인들은 오늘의 잘못된 교육열로부터 희생당하는 아이들의 현실을 놂이라는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어 퍽 든든했다.
<아동문학평론 2015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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