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왜 춘향에게 수절을 강요하였나?
권영상
금준 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 가효는 만성고라.
촉루 낙시할 제 민루낙이요.
가성 고처에 원성고라.
학창 시절에 외었던 이몽룡이 변사또의 실책을 탓하는 시다.
금동이의 향기로운 술은 만 백성의 피요, 옥소반의 아름다운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았더라.
본관 사또 생신날, 이몽룡은 거지차림으로 초대받지 않은 찬짓상에 앉아 이 시를 읊조린다. 그때다. 동서남문에서 역졸들이 마패를 들고 들이친다.
“암행어사 출도야!”
좌수 별감 넋을 잃고, 이방 호방 혼비백산한다.
“어 추워라. 문 들어 온다. 바람 닫아라. 물 마른다, 목 들여라.”
이렇게 정신을 잃고 우왕좌왕 할 때에 이 몽룡 좌정하여 본관 사또를 봉고파직한다. 그러고는 모른 척, 동헌 뜰에 꿇어앉은 춘향을 보고 명한다.
“얼굴을 들어 나를 보아라.”
춘향이 고개 들어 앞을 살펴보니 걸객으로 왔던 낭군, 어사또다.
“얼씨구나 좋을씨고 어사 낭군 좋을씨고, 남원 읍내 추절들이 떨어지게 되었더니, 객사에 봄이 들어 이화 춘풍 날 살린다. 꿈이냐, 생시냐, 꿈을 깰까 염려로다.”
하고 반 웃음 반 울음으로 좋아한다.
춘향전의 절정 부분이다.
어린 시절. 라디오 설 특집은 주로 춘향전이었다.
즐겨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 춘향전을 읽을 때면 그때마다 내 느낌이 조금씩 다르게 다가왔다.
작가는 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기생으로 설정했을까? 읽을 때마다 그런 의구심이 들었다. 춘향은 누구인가? 퇴기 월매의 딸이다. 어미가 노비면 자식도 노비가 된다는 원칙이 조선 신분이다. 기생의 딸은 기생이고, 기생은 자연히 천민이다.
천민인 기생이 주인공이라 불만이냐고? 아니다. 물론 소설은 남녀간의 신분의 벽이 심한 인물들로 설정할수록 좋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다 그런가. 로미오와 줄리엣은 신분상의 문제가 아닌 가문의 숙명적 은원관계로 사랑을 묘사하고 있다. 어떻든 주인공을 여염집 처녀로 하는 게 정상적이 아닐까 했었다. 그러나 여염집 처녀로 주인공을 삼는다 해도 역시 문제는 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던 시절 보통의 여염집 남녀가 자유연애를 한다? 그건 성리학을 숭배하는 이들에게 전혀 맞지 않는 일이다. 남원 오작교에서 당일로 만나 당일치기로 백년가약을 맺고 당일로 합방을 하는 일에 여염집 여자는 맞지 않다.
그래서 기생 춘향이었을까. 그것만은 아니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을 기생으로 삼은 데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우선 이팔 청춘 남녀의 만남이 자유롭다는 점이 되겠다. 그리고 또 하나 진짜 이유는 이것이 아닐까. 수절 강요다. 조선은 수백 년을 내려오며 수절, 수절을 외쳤다. 아무리 수절을 외쳐도 수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자유로운 성적 욕구의 본능을 한낱 허깨비같은 성억압 이데올로기로 막을 수 있다는 발상은 어리석었다. 일부다처의 풍습과 성의 자유로운 풍습은 신라와 고려를 통해 이 땅에 쭉 내려오고 있었다. 그 결과 조선시대에 와서도 양반들에겐 일처일첩제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성을 죄악시했다. 여럿 처를 두던 풍습에서 벗어나 본부인을 한 명으로 한정하였다. 태종은 왕비를 한 명으로 삼았고 나머지 비는 후궁으로 삼았다. 후궁의 자식들은 왕비의 자식과 달리 군과 옹주로 낮추어 칭했다. 일반인들 역시 첩의 자식에게 과거제도의 기회를 박탈했고 사회적 지위마저 강등했다. 그런데도 자유로운 성문화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런 판에 마지막으로 의지할 데는 단 한 곳밖에 없었다. 기생이다.
기생 중엔 일패 이패 삼패가 있다. 일패는 이를테면 황진이나 이매창 같은 기생들이다. 이들은 도도한 기생들로 밀매음이 허용되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패, 삼패는 시 서 화 노래의 재기도 발휘했지만 밀매음도 행했다. 어찌됐든 남성들과 성적 관계를 자유로이 가질 수 있는 신분계층이 이들이다.
그러니까 기생은 그들의 직분으로 보아 수절할 까닭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자 주인공으로 기생인 춘향을 선택했다. 수절할 신분이 아닌 춘향에게 작가가 수절을 강요한 이유는 뭘까. 거기엔 ‘춘향이, 너마저’가 아니라 ‘하물며 춘향이도’ 때문이다. ‘밀매음을 해도 아무 문제 없는 춘향이도 하물며 수절을 한다’ 이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수절, 수절, 수절을 백 번 외치기 보다 이 한번의 ‘하물며 춘향이도’ 효과에 기대를 걸었던 거다. 춘향은 이 수절 이데올로기를 홍보하기 위해 동원된 인물이다.
그는 수절을 실천하기 위해 저항한다.
그 대항인물로 등장하는 이가 변사또다. 변사또는 지속적으로 춘향에게 수청을 요구한다. 그가 요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춘향이 관기이기 때문이다. 관기는 관에 속한 기생으로 관리의 요청에 응해야 한다. 그런데 춘향은 수청 들기는 거부한다.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이 있다. 기생인 춘향의 신분이 갑자기 여염집 여자로 둔갑한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로 춘향은 '바느질과 길쌈 재주가 있고 문장을 겸전하여 여염집 딸과 마찬가지다.' 라든가 양반 자제 이몽룡을 만난 건 '하늘이 내려준 특별한 인연'이니 그 인연으로 보자면 양반의 딸과 같은 신분이므로 백년가약을 맺었다는 진술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지아비가 있는 춘향은 그런 이유로 수청을 들 수 없다는 것이다.
교묘한 궤변이 숨어있다.
춘향은 기생이지만 기생이 아니고 여염집 여인이라는 것이다. 좀 이상한 논리가 아닌가. 그러니 한 남자와 백년을 살기로 맹세했으므로 절대로 수청을 들 수 없다, 그 말이다. 여기에 이 소설의 숨겨진 진실이 있다. 이 춘향전이 기생들을 향해 수절하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금방 알 수 있다. 그것은 춘향의 입을 빌려 여염집 여자들에게 소리치는 것이다. 하물며 기생인 나도 한 남자에게 정절을 바치는데 여염집 여인들아, 당신들도 나를 따라 일부종사하시오. 그 말 아닐까. 그 말을 하기 위해 교묘히 신분세탁까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떻든 조선은 여성에게 수절을 요구했다.
요구만 한 게 아니라 수절을 견딘 여인에겐 상도 내렸다. 정렬부인이다. 이 소설에선 신분 상승의 기회도 주었다. 그러나 암만 보아도 이 소설 속의 신분상승엔 진정성이 안 보인다. 왜냐? 양반 자제 이몽룡이 진정으로 기생의 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여염집 여인으로 세탁된 춘향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가 기생의 딸을 사랑했다면 이 소설 속에 당대의 신분제도나 신분질서와 갈등을 일으키는 부분이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이 소설 그 어디에도 양반의 아들이 관기의 딸과 혼인한 것에 대한 도전이 없다. 있다면 여염집 여인 춘향과 변사또의 갈등만 있을 뿐이다.
신분사회를 만든 이들이 누구인가. 성리학을 조선이라는 사회에 실현시키겠다는 학자들이며 정치가들이다. 그들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하위신분을 상승시켜줄 까닭이 없다. 홍길동만 보아도 그렇다. 서얼인 그는 신분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온갖 방식으로 싸운다. 결국 임금으로부터 병조판서를 제수받지만 그는 떳떳한 양반으로 이 땅에서 살지 못하고 끝내 조선땅을 떠난다. 조선의 신분제도가 얼마나 강고한가를 보여주는 소설이 홍길동전이다.
춘향이 이몽룡과 혼인을 하는 신분변동엔 당시 민중의 신분상승 욕구를 무마시키려는 기만성이 숨어 있다. 시중을 떠도는 판소리 춘향가가 소설로 정착하는 데는 글을 아는 선비 계층의 손이 있었다. 조선 시대의 선비들, 지방의 벼슬없는 한가한 선비들도 그들은 그들의 임무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란 무엇인가. 성리학의 실현이다. 조선은 민중을 계몽하는 대상으로 보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내린 수절의 댓가는 오직 ‘정렬부인’이다.
정렬부인이란 전근대사회에서 있어왔던 정조과 지조를 지킨 부인에게 내리던 칭호다. 조선 후기의 여인들은 이 수절 이데올로기를 위해 언제든 목숨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정조를 미화하는 일이며 가문의 번듯한 위상을 위한 희생이었다. 여인들은 그 이데올로기에 충직하기 위해 허벅지에 바늘을 찌르며 그 미덕 아닌 미덕의 탑을 쌓아올렸다.
“한참 이리 즐길 적에 춘향모 들어와서 가없이 즐겨하는 말을 어찌 다 설화하랴. 춘향의 높은 절개 광채 있게 되었으니 어찌 아니 좋을손가?”
이 부분은 3인칭인 작가(판소리를 소설화한 양반)가 소설 속에 끼어들어 하는 말이다. 춘향의 높은 절개를 칭송하고 있다. 이것만 보아도 조선 선비들이 수절 캠페인의 선봉장이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이 소설 속의 관리인 변사또 역시 그렇다. 그는 춘향의 수절과 절개의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를 강화한, 춘향 못지 않게 비중있는 유교적 인물이다. 그는 춘향에게 수청을 요구하는 부정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실은 춘향의 일부종사, 즉 ‘하늘이 낸 열녀’를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는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은 그렇게 모든 양반을 동원하여 여성의 영혼을 옭죄었다.
시대는 정치 이데올로기를 생산한다.
조선 후기 여성의 미덕은 농경사회답게 자식을 많이 낳는 일이며, 남편을 잃었을 때는 수절하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미덕은 그와 다르다. 더구나 수절은 미덕이 아니다. 한 때는 ‘아들딸 구분 말고 하나 낳아 잘 살자’고 했지만 오늘날엔 아기를 낳은 이에게 혜택이라는 선물을 내놓는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 있다. 개인이라는 존재는 국가가 생산해내는 이데올로기의 제물인가. 춘향전 속에 그런 아픔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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