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념에서 벗어나기
권영상
산에 가려고 신발 끈을 묶는데 문득 며칠 전에 쓴 글이 떠오른다. 글을 쓰는 순간 잠깐 미심쩍어한 말이나 문장이 가끔 뜻밖의 장소에서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야채’라는 낱말이다. 나는 그 때 상추 쑥갓 무 배추 등을 파는 동네 가게를 ‘야채가게’라고 썼다. 쓰면서 ‘이 말?’ 하며 약간 미심쩍어 했다. 근데 그 낱말이 며칠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 벌레처럼 살아나온다. 그건 언젠가 내가 읽었던 책 때문이다. 그 책에선 그들 푸성귀를 ‘채소’라 써야 바르다고 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야채가게가 아니라 ‘채소가게’가 옳다고 했던 것 같았다.
나는 묶던 구두끈을 풀고 내 방에 들어왔다. 떠올랐을 때 찾아보지 않고 넘어가면 금방 이 생각을 또 잊고 만다. 그 책을 찾기 시작했다. 언젠가 주말농장에 빠진 내게 딸아이가 사준 책이다. 그때 그 책은 꽤 크고 두툼한 걸로 기억이 되었다. 여기저기 쌓여있는 책을 뒤졌다. 암만 뒤져도 찾을 수 없다.
‘분명 투툼하고 큰 책이었는데.....’
나는 그만 책 찾기를 포기하고 책상 위 메모지에 ‘야채가게?’라고 써놓고는 다시 등산화를 신었다.
야채가 옳은 말일까, 채소가 옳은 말일까. 메모를 해 두었으니 그 생각은 이 순간부터 잊기로 했다. 찾아보면 해결될 일에 빠지기 싫었다.
근데 그 생각을 말자고 한 때문일까. 산을 오르는 데 자꾸 그 야채와 채소라는 말이 새끼의 새끼를 쳤다. 채소는 들풀로 이어졌고, 들풀은 다시 남의 나라에서 들어온 외래종과 우리 땅을 지킨 토종으로 연결되었다. 이 우면산에도 잔뜩 들어와 사는 외래종이 있다. 서양등골나물이다. 가끔 보면 누군가가 뽑아다 나뭇가지에 걸어둔다. 외래종이라고해 그렇게 보는 족족 뽑아 퇴치해야하나? 생각은 그리로 옮겨붙었다. 우리나라에 사는 들풀 치고 국경을 넘어오지 않은 풀이 대체 몇이나 될까. 개비름이며 별꽃, 벼룩나물도 다 유럽이며 남의 나라에서 들어왔다. 그들을 뽑아버려야 한다면 귀화한 김씨 박씨 정씨의 후손은 어찌하고, 동남아에서 살러온 처녀들은 어찌할까. 하여튼 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느라 산은 올랐으나 산에서 본 것 들은 것이 하나도 없다. 눈 쌓인, 제법 멋진 산을 오르면서 뭘 보았는지 아무 기억이 없다. 나는 머릿속을 털어내려고 찬바람과 마주 서서 내 안의 답답한 숨을 내쉰다. 때로 맑은 정신을 얻으러 산에 오면서도 집에 두고 온 번다한 일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그건 현실의 일이 진드기처럼 머릿속에 늘 절어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산을 올라도 오른 것 같지 않고, 쉬어도 쉰 것 같지 않다.
내려올 때는 햇빛 잘 드는 길섶 나무 벤치에 잠시 앉아보았다.
소로로 부는 바람이 턱을 스치고 간다. 한겨울 산속이어도 햇빛은 햇빛이다. 바람이 차지 않다. 눈을 감아본다. 햇빛이 눈부셔서 감은 눈 안이 보석처럼 환하다. 정신을 모으고 바깥 세상에 귀를 기울인다. 발 밑에서 바삭대며 부서지는 눈 소리가 그칠 즈음 솔바람소리가 들린다. 귀를 틀어막고 있는 문이 천천히 열리는 모양이다. 솔바람소리 끝에 머리 위에서 우는 새소리가 들린다. 즈빗즈빗즈빗, 울음소리가 흰눈처럼 차고 신선하다. 내 구더분한 몸이 일시에 서늘해지는 기분이다. 참을 수 없다. 눈을 뜨고 나무 위에서 울려나는 울음소리를 찾는다. 솔방울만한 것이 솔가지 사이로 움직인다. 박새 아니면 곤줄박이다.
새소리를 들으며 햇빛을 받고 있는 늙은 곰솔 등허리를 본다. 조그마한 새 한 마리가 나무 등허리를 타고 강종강종 오르내린다. 동고비다. 주둥이가 뾰족한 동고비가 솔껍질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곤두박질하며 내려온다. 솔껍질 속에 숨은 벌레를 찾는 모양이다. 작은 발가락으로 솔껍질을 그러잡고 땅 위를 걷듯 가파른 나무 등허리를 아무 거리낌없이 오르내린다. 강종강종 뛸 때마다 솔껍질에서 잽잽잽 발소리가 난다. 동고비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온통 관심이 솔껍질 틈새에 가 있다.
한번 눈이 열리니 그 너머 오리나무 등걸에 쇠딱따구리가 보인다. 오리나무를 껴안고 빙글빙글 돌며 부리로 껍질을 쪼은다. 수놈이다. 빨간 점 한두 개 박힌 쇠딱따구리도 눈 쌓인 삼동을 나려면 배를 가득히 채워야 한다. 부리로 톡톡톡 나무를 쪼기에 바쁘다. 그 옆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파헤쳐진 죽은 나무 둥치에도 또 한 마리 쇠딱따구리가 있다. 재게 움직이는 그들을 돌아다보고 있는 일이 재미있다. 이 겨울에 그들처럼 재재바르게 움직이는 목숨을 산에서 본 적이 없다. 그들 모두 햇빛 드는 비탈 쪽에 모여 서로 큰 소리내지 않고 가뿐가뿐 움직이며 먹이를 찾는다.
서울시공무원 교육원 건너편 산을 바라본다. 그쪽 북향 산비탈 소나무에서 눈이 쏟아져 하얗게 날린다. 그러더니 그 눈가루를 뚫고 꿩 한 마리가 솟구쳐 오른다. 내가 서 있는 이쪽 산으로 빠른 날갯짓을 하며 날아온다. 나를 보았나 모르겠다. 이 따스한 산비탈을 두고 내 머리 위로 휙 지나간다. 겨울이라고 산이 호흡을 멈춘 듯 해도 아니다. 산에 기대어 사는 생명들을 품고 그들의 목숨을 보살핀다.
내 안이 아니라 내 바깥의 세상에 집중을 하니 비로소 새가 보인다. 내 안이 잡념으로 가득차면 바깥의 것들이 들어설 틈이 없다. 밖의 것을 거부하면 부족한 나의 것으로만 세상을 살아야 한다. 내 안의 번잡한 생각을 몰아내지 않으면 살아 움직이는 새를 보지 못한다. 새를 보면 영혼이 자유로워진다. 우리는 가끔 막힌 마음의 창문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 그러면 내 안의 체온이 바깥의 서늘한 기온과 같아진다. 그때가 푸른 정신으로 번쩍일 때다. 새에 눈을 주기 시작하면 여태껏 못 보던 곳에서 새를 만나고, 새 소리를 듣고, 새의 떨어진 깃털을 줍고, 눈 위에 새겨진 새의 발자국을 쫓아가 나도 새처럼 자유로움을 얻게 된다. 한번 길을 내거나 트기 어렵지 눈이나 귀를 열면 작은 것들의 목숨작업과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새만이 아니다. 들꽃은 뭐 안 그런가.
쇠별꽃, 돌콩꽃, 꽃마리, 김의털꽃, 다닥냉이, 벼룩이자리 같은 풀꽃은 좀해 사람눈에 띄지 않는다. 아파트의 그늘이거나 풀숲 어두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소리없이 나타났다가 소리없이 사라진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도 수 백 명의 사람들이 매일 먹고살기 위해 분주히 집안팎을 드나든다. 그러나 작은 풀꽃에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주로 승용차로 포장된 길을 가서 시멘트로 둘러쳐진 직장에서 하루를 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풀꽃을 피해다니며 사는 그들의 눈에 풀꽃이 보일 리 없다. 혹 떨어진 동전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기 전에는 허리 숙일 일이 없다. 그러나 이들도 들꽃에 관심의 길을 트면 곧 그들의 매력에 빠지고 말 거다.
봄이나 여름날, 잡념이 많을 때면 가끔 가는 곳이 있다. 한적한 아파트 뒷마당이다. 내 책상 연필꽂이에 꽂힌 손잡이가 달린 돋보기를 들고 나간다. 허리를 숙여 뒷마당 그늘 밑을 뒤진다. 그러다 쇠별꽃이나 벼룩이자리를 만나면 흙바닥에 주저앉아 돋보기로 그들 작은 꽃을 들여다 본다. 몇 번인가 내 눈과 풀꽃의 거리를 맞추어 들여다보는 순간 나를 짓누르는 잡념에서 벗어난다. 작은 풀꽃을 통해 오히려 큰 우주의 형상을 더듬어 보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임의의 한 부분은 항상 전체의 형태와 닮아있다는 프랙털 fractal의 근거를 체험하는 일은 즐거움 그 이상이다. 나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 은밀한 비밀을 캐듯 들고간 스케치북에 눈꼽만한 꽃들을 옮겨 그린다. 남들이 좀 나무란다 해도 연필로 들꽃의 숨결을 옮겨 그려보는 일은 매우 흥미있다. 무엇보다 외면당하며 살아가는 작은 들꽃들에게 사람노릇을 하는 것 같아 뿌듯하다.
마구 앞만 보고 허겁지겁 사는 중에도 잠시 멈추어 보면 뜻밖의 경이로움을 만나게 된다. 여태 우리가 경험할 수 없었던 기쁨, 곧 재화로 따질 수 있는 것만이 가치있다고 믿어왔던 세속의 신념을 뒤집어엎는 그 기쁨에 온몸을 떨게 된다.
산에서 내려서서 집 가까이 느티나무 길을 걸어온다.
화장품회사 꽃담장 시든 풀더미에 참새 떼가 내려와 있다. 얼핏보아 새인지 바람에 날리는 마른 풀인지 구분이 안 간다. 풀더미 안에서 가쁘게 두리번거리던 눈들이 푸득, 날아오른다. 참새들이다. 재조발대는 참새소리가 귀에 닿는다. 지난해에 살았던 꽃담장의 꽈리화초 자리를 보니 마른 꽈리주머니가 여러 개 달린 채로 그대로 있다. 범부채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붓꽃이며 맥문동 마른 잎줄기들도 그대로 눈에 띈다. 할미꽃이 서너 포기 피었었는데 그 자리에도 할미꽃 마른 이파리가 흙에 붙어있다.
작은 것들이라고 다들 어디 땅속에 숨어 있는 게 아니다. 우리와 똑 같은 모습으로 찬바람에 시달리며 겨울을 같이 넘긴다. 그러니까 오늘은 나 홀로 눈 덮이 산을 오르고 온 게 아니다. 어쩌면 그들 곁을 가까이 지나온 느낌이다.
집에 들어와 책상 위에 메모해 둔 ‘야채가게?’를 집어든다.
그리고 여기저기 쌓아둔 책들을 다시 찾아본다. 마침내 큰 책에 묻혀있는 손바닥만한 책을 찾았다. “주말농장 즐기기”란 책이다. 딸아이가 사준 그 책이다. 크고 두텁다고 생각했는데 작고 얇다. 내 착각이다. 나는 그 동고비만한 책을 펴 목차를 읽었다. 채소에 관한 글이 나온다. 쉬운 대로 간편히 적자면 이렇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야채’라는 말은 일본어다. 중국에선 이를 소채라 부르고, 우리나라에선 ‘채소’라 부른다. 그러니 바르게 쓰자면 ‘야채가게’가 아니라 ‘채소가게’라 쓰는 게 옳다.
작은 책들은 늘 큰 책에 묻혀 제 존재감을 잃어버릴 때가 많다. 작은 새들이며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은 풀꽃들 또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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