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그림 심부름
권영상
“오후 2시까지 그림 좀 갖다줘.”
겨울방학 내내 그림을 그리던 아내의 작업이 끝난 모양이다. 아침에 출근을 하면서 내게 약도를 그린 쪽지를 주고 갔다. 그림에 액자를 맞추어 넣을 양재동 aT센터 맞은편에 있는 스튜디오다.
나는 10시쯤 처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국에서 잠시 들어와 제 일을 보느라 내 차를 가지고 강릉에 갔다. 오후 2시까지 서울에 댈 수 있냐니까 어렵단다. 걱정이다. 50호 그림을 택시에 싣고 가기가 좀 거북해 보였다.
나는 할 수 없이 혼자 점심을 챙겨먹고 포켓으로 싼 그림을 껴들고 한길로 나갔다. 간신히 택시를 탔다. 약도를 그려준 우체국 앞에 내렸다. 그러나 암만 찾아도 적어준 스튜디오가 없다. 스튜디오에 전화를 걸었다.
“우체국서 곧장 100미터를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고기서 우회전 하세요. 또 쭉 오시다가 막다른 길이 나오면 고기서 또 우회전 하세요. 오렌지부동산이 나올 겁니다.”
주인은 내가 차를 가지고 찾아가는 걸로 알고 있었다. 듣고 보니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나는 그림을 껴들고 그가 가르쳐준 길을 찾아 걸었다. 차를 영 안 쓰는데 이렇게 꼭 필요할 때면 누가 가져간다. 그림을 안고 꽤 먼 길을 걸어 간신히 목적지에 닿았다. 지하다. 그림을 맡기고 스튜디오를 빠져 나오려니 거짓말 같이 숨이 차다.
“젠장!”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불쑥 나왔다.
드문드문 눈 쌓인 골목길을 걸어 버스 정류장에 가 섰다.
길 건너 맞은편에 양재동 꽃시장 건물이 한 눈에 보인다.
‘나온 김에 꽃이나 구경하고 갈까?’
내 발이 나보다 먼저 건널목을 찾아 건너고 있었다.
지난 4,5년 동안 이 양재대로를 지나 청계산 밑에 있는 주말농장을 매주 오갔다. 오가면서도 이 꽃시장을 빤히 보며 그냥 지나쳤다.
우리나라 3대 꽃시장으로 꼽힐 만큼 큰 시장이 양재동 꽃시장이다.
예전엔 여길 찾아와 난도 사고, 묘목도 사고, 십자매며 카나리아도 샀다. 그런 과거가 있어 그런지 꽃시장을 지날 때마다 꽃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그 시절엔 내 나이가 젊어 꽃을 보러다닐 줄도 알고, 비싼 꽃이어도 내가 힘들게 번 돈으로 그 꽃을 살 줄도 알았다. 꽃 특별전이 있으면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와 실컷 꽃구경을 하고 갈 때는 화분도 사고 꽃씨도 샀었다. 그러니까 그때는 밥보다 순수를 더 사랑했다. 꽃시장에 대한 그리움이라면 어쩌면 그런 순수했던 젊은 날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나는 건널목을 건너 여유있게 오후의, 좀 많이 풀린 겨울 햇빛을 받으며 꽃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직장 출근이 없다는 게 때로는 서러울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아름답기도 하다. 평소에 그냥 지나치고 말던 곳도, 아무 구속없이 호젓하게 들러볼 수 있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우리는 언제나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만 했지 그 근방의 것들에 관심을 쓰지 못하며 살았다. 남한산성을 지날 때도 들르지는 못하고 말로만 ‘아, 여기에 만해기념관이 있지’ 라고나 했다. ‘아! 여기에 창덕궁이 있지’ 라거나 ‘아! 한강에 유람선이 다니지’, ‘아! 남산에 남산타워가 있지’ 그러며 살아왔다.
꽃시장에 들어서자, 나는 느긋하게 6번 건물의 문을 열었다. 따스한 실내온도와 함께 확 밀려오는 양란의 화려한 꽃빛깔과 향기! 그것들이 성장한 여인들처럼 나를 가로막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어 섰다. 그리고 한참 정신을 차린 뒤 그꽃 앞으로 다가갔다. 꽃들의 요염한 빛깔과 자태와 중년 여인의 멋드러진 음부를 닮은 꽃의 오묘함에 빠져들었다. 곱고 반짝이는 난꽃을 대충 보며 지나가기엔 아깝다. 나는 하나하나 눈에 넣을 듯이 들여다 봤다.
“사진 찍고 싶으면 찍으며 보세요.”
내 모습이 딱했던 모양이다.
난 가게 여자 주인이 사진을 찍으라고 권한다. 나는 이 뜻밖의 선물같은 말에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어나갔다.
그런데 화려한 꽃에는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처음 볼 때처럼 사람을 계속 설레게 하지 못한다는 거다. 열 발자국을 다 못 가고 나는 그만 지쳤다.
사람의 심장을 오래 흔들게 하는 꽃이 있다면 그건 어떤 꽃일까. 현대미술가들은 같은 계열의 색상보다는 오히려 계열의 거리가 먼 것일 때 사람의 감정을 붙잡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초록색 나무 숲에서 발견하는 노란 꽃이나 흰색의 이미지가 더 시선을 끈다는 거다. 하긴 지구 최초의 꽃인 목련이 흰색을 선택했다는 것만 보아도 제법 그럴듯한 주장이다. 화려한 꽃빛에 질린 나의 시선은 어느덧 초록 나무들에 가 있었다.
6번 꽃시장의 맨 끝에서 히아신스를 만났다. 나는 히아신스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한창 피어오르는 꽃방망이가 탐스럽다. 빨강과 보라와 하양.
나는 아직 꽃피우지 않는 것들 중에서 하얀 몽오리를 문 히아신스를 골랐다. 집에 분홍 히아신스가 있다. 재작년 퇴근길 골목에서 산 거다. 지지난 주부터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데 아직 기척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생애를 살 줄 아는 꽃이 히아신스다.
꽃의 목숨을 제대로 아는 꽃이다. 꽃다운 꽃이라는 말이다. 이를테면 미인박명의 매운 향기를 체득하는 꽃이다. 아름답되 추함이 없고, 사람을 매혹하되 작별을 냉혹히 한다. 그러므로 냉혹한 작별의 잔영이 사람의 머리에 향기처럼 오래오래 남는다. 꽃이 꽃다우려면 이처럼 이별을 황홀히 할 줄 알아야 한다.
히아신스가 그렇다. 나의 베란다에선 늦어도 3월쯤, 바깥에 봄눈이 쏟아지는 날에 꽃을 피운다. 무려 20일간 활화산처럼 피운다. 그 일은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는 일종의 성적 유혹 행위다. 알뿌리 화초들의 생애라는 게 다 그렇다. 그들은 꽃을 피우는 임무를 가지고 이 땅에 왔다가 사라진다. 곤충도 그렇다. 그들이 여러 차례 허물을 벗는 가장 큰 이유는 교미하기에 좋은 몸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화려한 나비가 되고 매미가 된다. 그런 뒤 아쉽게도 짜릿한 교미가 끝나면 그들의 인생도 끝난다. 그들은 이 땅에 와 종족 보존을 위한 극히 짧은 임무를 마치고 그렇게 소리없이 사라진다.
수선화 향이 좋다지만 히아신스 향도 만만치 않다. 목숨을 사루듯이 이른 봄 한철 달콤한 꽃향을 미치도록 풍긴다. 그러고 때가 되면 운명하듯 그 자리에 탁 쓰러져 사라지고 만다. 일 년을 흔적도 없이 흙속에 몸을 숨긴다. 바깥에 눈 내리는 3월이 다시 올 때까지. 히아신스의 향기에 젖어본 사람이라면 그때까지 그 아득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히아신스가 여인이라면 그에겐 사람을 애끓게 하는 세련된 농염이 있다. 그게 박명한 히아신스의 고귀함이다. 그처럼 짧고도 서러운 사랑을 할 줄 아는 이가 히아신스 말고 또 누가 있을까.
나는 서슴없이 하양 히아신스를 샀다. 아니 고귀한 3월의 봄을 샀다. 그걸 사들고 다시 8동 꽃시장으로 옮겼다. 웬만한 집 정원에 두면 좋을 돌로 만든 확이 있다. 부레옥잠이 떠 있는 물확 주변을 서성거리자, 주인이 다가온다. 가격이 만만치 않다.
8동이 끝나갈 즈음 딸아이한테 문자를 보냈다.
“아빠 꽃시장 왔다 간다.”
딸아이가 다니는 회사가 바로 꽃시장 근방에 있다.
히아신스를 들고 꽃시장을 빠져나오는데 답장이 왔다.
“꽃시장에 왜 왔어?”
그러고 보니 그렇다.
지금 이 시간에 난데없이 꽃시장에 왔다는 내 문자를 보고 딸아이가 놀랐겠다. 아직도 딸아이는 내가 직장을 놓았다는 게 실감이 안 되는 모양이다.
“엄마 심부름 왔다가 들렀다.”
나는 그렇게 문자를 또 보냈다.
“아빠, 뭐 샀어?”
“히아신스. 이제 문자 그만하고 일 하렴.”
문자를 보내고 나는 휴대폰을 속주머니에 넣었다. 집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여기서 3킬로쯤. 예전 고향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학교까지 4킬로를 걸어다녔다. 그 길을 생각하고 걸었다. 다행스런 것은 걷는 일이 내 체형에 맞다는 점이다.
“잘 가. 아빠.”
문자 그만 보내라는 데 문자가 또 왔다.
여태 쫓기듯 직장을 다니느라 딸아이와 문자를 해본 적이 드물다. 나도 바쁘고, 딸아이도 바빴으니까. 나도 바쁘고 아내도 바빴으니까. 아내도 바쁘고 딸아이도 바빴으니까. 나는 휴대폰만 들고 다녔지 정작 이 정도 문자를 보내고 받는 여유를 갖지 못했다.
직장을 내려놓는다는 건, 본디의 나를 회복하는 일이다.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나와 세상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나와 관계했던 이들과의 관계를 좀더 솔직히 회복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나와 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던 시간과의 친밀한 회복이다.
나는 집까지 오는 3킬로미터를 내게 주어진 시간과 함께 여유있게 걸었다. 양재천을 건널 땐 다리 난간에 서서 물위에 뜨는 오후의 해를 내려다보고, 하얗게 마른 갈대숲을 보고, 자전거길을 달리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았다. 거기서 다시 양재역을 지나고, 구청 앞을 지나 내 일상의 도심속으로 성큼 들어섰다.
아, 배 고프다!
집에 가면 양이 차도록 밥을 한 그릇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지금처럼 때가 아닌데도 배가 고파 본 적이 여태 없었다. 직장에 나가 점심 한 끼를 먹고 오는 것 이외의 먹는 행위를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이제 내 몸도 자유로워진 듯하다. 밥 먹을 때가 아닌데도 이렇게 배 고플 줄 안다.
집에 오니 현관문 앞에 난화분이 하나 놓여있다.
“축, 새로운 출발”
그런 띠가 묶여있다.
고향에 계신 내 고등학교 은사이면서, 오촌 종조카이신 칠순의 ‘백수’께서 보내셨다. 이제 나는 새로운 출발이다.
집에 들어오는 대로 사온 히아신스를 제 몸에 맞는 화분에 옮겨심고 ‘잘 크렴’ 하고 첫 대화를 텄다. 이제 나는 백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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