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나는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

권영상 2013. 2. 22. 16:02

 

나는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

권영상

 

 

 

 

그때, 나는 나를 미워했다.

미워할 정도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존재로 여겼다. 나는 그때 열여섯 살. 내 나이 열다섯에 어머니의 갑작스런 병환이 있었다. 어머니는 막내인 나를 아버지 손에 맡기고 입원을 하셨다. 길고도 긴 16 년이라는 세월을. 그런 불행한 일로 나는 중학교 졸업을 간신히 마치고,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생과 사의 무게에 짓눌려 살았다.

 

 

적잖은 농사를 지으시는 아버지는 쉬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는 늘 사랑방에 홀로 거처하시고 또 거기서 주무셨고, 어머니나 우리는 안방이나 사잇방에서 생활했다. 어디 나가 하룻밤을 자고 오는 일도 어머니를 통해 아버지의 의중을 물어보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자식 사이가 엄중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있어야할 자리가 비었다. 누님 두 분이 계셨지만 어머니 없는 자리는 너무 컸다. 집안팎의 모든 살림은 병원에 가 계신 어머니의 입원비 조달을 위해 있었다. 그러니 나는 해진 신발처럼 이리저리 밀려났다.

 

 

 

내가 사는 마을이라 봐야 고작 여섯 집. 친구할 사람이 없었다. 자연히 내가 찾은 곳은 집 뒷꼍에 있는 말없는 호수였다. 경포. 나는 늘 거기에 나가 하루의 대부분을 외로이 보냈다. 나른한 호숫가 풀섶에 누워 목이 마르도록 하늘을 보거나, 그도 심심하면 호수에 돌을 날렸다. 간혹 성질이 불같이 치밀면 호수 건너편 마을을 향해 주먹질을 했다.

“야, 이 나쁜 새끼들!”

아무 까닭도 없이 나는 소리쳤다.

 

무려 3년을 버려진 신발처럼 그렇게 살았다. 물론 때로 공사판에 나가 질통도 지고, 품앗이 일도 하고,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싫은 농사일도 했다. 그렇게 산다고 밥을 굶었거나 잠자리가 없거나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도 고통스러운 건 내게 아무 희망이 없다는 거였다. 희망! 보리씨만한 희망이라도 있다면 덜 서러웠을 거다. 남들은 교복을 입고 학교로 가는데 나는 갈 곳이 없어 호숫가로 나가 혼자 울었다.

 

 

 

 

그렇게 외톨이로 굴러다닐 때다.

경포대 해수욕장 주변을 굴러다니던 넝마주이를 만났다. 그는 나보다 한 살 많았다. 경포대가 관광지였으니 그의 일거리는 많았다. 나는 그를 사귀면서 술을 배웠고, 금방 그의 친구가 되었다. 외로우면 우리는 만나 술을 마셨다. 나는 진학을 못해 분한 마음에 술을 먹었고, 그는 가족을 먹여살리는 어린 가장의 직분이 무거워 술을 마셨다.

 

 

 

어린 가장인 그에겐 무엇보다 돈이 귀중했다.

이제 술 그만 마시자고 먼저 일어서는 쪽은 그래서 늘 그였고, 그를 붙잡는 쪽은 늘 나였다.

왜 돈 아깝게 정신을 잃도록 마시냐고 그가 어느 날 내게 따졌다.

“세상에서 나만큼 불쌍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어디 정신 안 나가게 마실 수 있나!”

나는 아무 부끄러움도 없이 그 가난한 친구 앞에서 그렇게 소리쳤다.

“불쌍하다면 나도 불쌍해.”

그가 나를 위로했다.

“웃기지 말어. 넌 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때 내게는 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내가 가장 불쌍했고, 내가 가장 측은했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은 존재라는 것 말고는 그 친구의 아픔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렇게 가끔 내 친구가 되어주던 그가 어느 날 죽었다.

대관령 산그림자가 파랗게 얼비치는 호수에 몸을 던졌다. 배를 타고 나간 잠수부가 그의 퉁퉁 불은 몸을 건져올리는 걸 본 이후로 나는 다시는 경포에 나가지 않았다.

 

 

 

 

그후, 나는 대학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혼자 오래도록 외롭게 살아온 버릇이 나도 모르게 내 몸에 나타났다. 길을 가다 오래된 나무를 만나면 나무에게 말을 건다.

“오랜 세월을 모나지 않게 잘 살아왔구나.”

그러며 물러서서 ‘임진왜란도 보고, 일제 식민통치도 겪고, 육이오 사변도 다 겪었겠구나.’ 그런 말을 해주고 나무와 헤어진다.

 

산에서 풀꽃 한 송이를 만나도 거저 가지지 않는다.

‘이렇게 피느라 애썼다.’거나 ‘모냥 나게 잘 가꿨구나.’ 아니면 ‘내가 아는 종우만큼 이쁘구나.’ 그런다. 그래야 속이 편하다. 그들이 이 지구별에 온 까닭을 내가 알 리야 없지만 같이 이 별에 온 사람으로서 모른 척하고 지나친다는 게 미안하지 않은가.

 

 

언제부터다.

척추관 협착증이 와 오른쪽 다리에 통증이 심해졌다. 오십 미터를 걷기 힘들만큼 종아리가 터질 듯 아팠다. 지하전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는 내게 이 듣도보도 못한 통증은 나를 괴롭혔다. 계단을 통하지 않고는 지상으로 올라갈 수 없으니까.

가파른 계단 앞에 설 때면 나는 왼쪽 다리에게 당부를 한다.

“그간 살아오느라 애쓴 오른쪽 다리의 고생을 너도 알지? 힘든 일일수록 오른 발을 먼저 내딛었으니까. 이제는 왼발인 네가 고단한 일을 좀 대신해 줘야겠다. 네가 애를 쓰면 언젠가 오른쪽 다리가 네 덕에 빨리 낫겠지.”

그러고는 천천히 계단을 걸어오른다.

몸의 중심을 왼쪽 다리에 두어야 한다. 그러니 영문도 모르게 왼쪽 다리가 내 몸의 짐을 지게 해선 안 된다. 그도 이유를 알아야 하고, 힘든 일의 대비도 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이야기라도 하고 왼쪽 다리를 부리면 한결 더 힘을 써준다. 힘을 쓰면서도 속으로 그러겠지. 언젠가 오른 다리가 나아지면 그때 나도 부끄럽지는 않을 테지, 하고.

이러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법이라 믿는다.

 

 

 

수술을 한다고 해도 재발 우려가 높다는 내 몸을 성하게 일으켜 세울 사람은 누구인가. 나와 내 몸밖에 없다. 무슨 일이 있을 때면 나는 내 몸이 내 말을 알아먹도록 천천히 달랜다. 그렇게 내 몸과 내가 하나가 될 때 나 혼자 애를 쓰는 것보다 더 큰 효력을 보는 경우가 많다.

사람의 병은 대개 나의, 내 몸에 대한 일방적인 행위 때문이다. 무리하게 산을 오르고, 능력에 과분한 직책을 탐내고, 힘에 부치는 짐을 짊어질 때 내 몸에 적신호가 온다.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기에 무슨 과업을 해 낼 때엔 친밀한 소통이 필요하다. 영육일체라는 말이 거기서 나온 거다.

 

 

 

일찍 일어나야 할 땐 잠자리에 들며 내 몸에게 말해둔다.

“5시에 일어나야 하니 얼른 일어나 다오.”

그러고 잠들면 내 몸은 어김없이 그 시각에 눈을 떠준다.

반대로 내 몸이 내게 말을 걸 때도 있다. 술을 조금 마시자든가, 담배를 끊자든가 하는 그런 요구다. 여러 차례 요구해도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내 몸은 내게 존대를 한다.

“술 조금 마십시다.” 라거나 “담배 이제 끊어요.” 한다.

“‘담배 끊어요’라니 대체 누구 보고 하는 말이에요?”

가끔 동료교사들이 내 책상머리에 오면 컴퓨터 모니터에 붙여놓은 포스트잇을 보고 웃는다.

“나를 보고.”

그러며 웃어준다.

그런 배려와 노력 때문인가. 좀 늦기는 했지만 담배 피는 일을 그만 두었다. 금연 포기 한계점인 6개월을 지나 7개월째다.

 

 

 

 

나도 내 몸을 위해, 아니 내 몸도 나를 위해 깊은 고민 끝에 직장을 그만 두었다. 정확히 아직은 아니고 2월 28일이라야 직장 생활이 끝이다.

“혼자 집에 있으면 우울증 걸리기 쉽다는데 바쁘게 일할 거리라도 있어?”

친구들이 제일 걱정하는 말이 그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걱정은 없을 거라고 말해준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16살 무렵부터 호숫가에서 혼자 무료히 놀던 버릇이 남아있어 나 혼자 잘 논다. 매일 마시는 커피와 이야기하고, 나무와 이야기하고, 나는 나와 이야기하며 놀 줄 안다.

 

 

 

지난 해 3월, 직장의 내 방에 젊은 여자사서가 새로 왔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녀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

“내가 혼자 이야기하더라도 놀라지 말어요. 나하고 이야기하는 거니까.”

“예. 그러세요. 저도 가끔 저한테 이야기할 때가 있어요.”

뜻밖에도 그녀는 솔직했다.

국어를 가르치면서 도서실 일도 보느라 나는 거의 10여 년을 혼자 도서실에서 살았다. 그 바람에 혼자 있는 일이 아주 몸에 배었다.

하루를 마칠 때쯤 퇴근종이 울리면 나는 또 내게 이야기한다.

“자네, 열심히 일했네. 이제 집으로 가세.”

그러며 내 몸을 데리고 직장을 나서왔다. 오래도록.

 

 

나는 이게 나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지금도 믿는다.

어린 시절, 나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취급을 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그 시절 나는 어디에서건 버림받은 사람이라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그러나 ‘불쌍한’ 넝마주이 친구의 죽음을 본 이후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기로.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양인과 동양인의 차이  (0) 2013.02.24
피지섬 가보기  (0) 2013.02.24
입양해온 세 살배기 딸  (0) 2013.02.20
아내의 그림 심부름  (0) 2013.02.16
잡념에서 벗어나기  (0) 2013.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