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늙은 강아지 난나

권영상 2013. 1. 23. 13:50

 

늙은 강아지 난나

권영상

 

 

 

 

 

우리 집에 늙은 강아지가 있다. 난나다. 난나는 비록 늙긴 했어도 현관문 밖의 발소리에 깃털처럼 민감하다. 일요일 집에 있어보면 미세한 바깥소리에도 난나는 현관문을 향해 컹컹컹 짖어댄다.

“시끄러워! 누가 왔다고 짖어?”

손을 을러메며 말려도 물러서지 않고 짖는다. 누가 현관문 앞에 와 섰다거나 얼씬대고 있다는 확신이 서면 의기양양하다.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옹골차다.

 

“누가 오긴 왔나봐.”

아내가 고개짓으로 현관을 가리킨다.

나는 난나가 짖어대는 입을 막고 문을 연다. 정말 사람이 와 있다. 음식물 폐기 종양제 때문에 사인을 받으러 오신 반장님이다. 사인을 해드리고 문을 닫고 들어오면 난나는 나를 쓱 올려다 본다.

“어때요? 나 이 정도에요. 아직도 나 모르겠어요?”

그런 눈으로 으스댄다.

 

때로는 하도 짖어 나가보면 누군가 현관문에 중국음식점 신장개업 광고지를 붙여놓고 갈 때도 있다. 사람은 없고 사람 왔다간 그 흔적을 떼어 들고 들어오면 ‘그 보라구요.’ 뭐 그런 식으로 은근히 나를 쳐다보며 으쓱한다.

“야! 난나 똑똑하네. 어떻게 그리 잘 알지?”

하고 엄지손가락이라도 세워 보이면 겅중겅중 뛴다. 나 이 정도야, 그런 식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게 자기만족에 빠지거나 으스대지만은 않는다. 겸손할 때도 있다.

 

경비실 아저씨가 중요한 서류를 가져오시거나 아니면 등기 우편물을 가져왔는데 우리가 미처 인기척을 못 알아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난나가 알려주어 늦게 나가면 그분들께 좀 미안하다. 그래서 내가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면 난나는 그 말을 다 엿듣는 모양이다. 일을 마치고 돌아들어오며, 고마워! 하고 칭찬을 해주면 난나는 날뛰기보다 오히려 겸손해한다. 이럴 때에 제가 잘난 체 하면 사람인 내 체면이 구겨진다는 걸 아는가 보다. 그래 그런지 이럴 때는 ‘소임을 다 했을 뿐이에요.’ 뭐 그런 식의 겸손한 표정으로 자리에 가 앉는다. 가식으로 그러는 게 아니다. 속에 자만심을 감추었다면 그의 눈 속의 감정을 왜 못 읽어내겠는가. 반려견의 눈엔 진심만 있을 뿐이다.

 

 

 

분명한 건 반려견에게도 자신의 행위와 결과에 대한 책임감과 자제력이 있다는 점이다. 혹, 누가 오지 않았는데도 잘못 짚고 짖어대는 경우가 있다. 그런 때에 나가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냥 들어오면 난나는 좀 미안해 한다. ‘헛걸음 시켜 미안해요’ 하는 표정으로 눈을 둘 데가 없어 머쓱해한다. ‘이거 내가 헛다리 짚었네.’ 그런 반성의 태도도 분명 표현한다.

 

 

난나가 우리 집에 온 지 무려 13년이나 됐다.

딸아이가 중학교 2학년 때다. 강아지를 사내놓으라고 밤낮 뗑깡을 부리는 바람에 그걸 이겨내지 못하고 이 푸들을 분양 받아왔다. 그 사이 딸아이는 대학을 마치고 직장을 다닌다. 난나라고 나이를 안 먹을 수 없다. 중년을 넘어 벌써 노년에 접어들었다. 작년인가 탄탄하던 이도 여러 대 빠졌다. 이가 빠져 단단한 사료를 못 먹을까 그것도 걱정이었다.

 

주문한 치킨을 식탁에서 먹는다거나 육류를 구울 때는 식탁 아래에 있는 난나 보기에 좀 미안하다. 냄새에 민감한 게 난나고 이까지 안 좋은 형편이다 보니 난나는 낮은 데서 식탁 위에 올려진 음식을 먹고싶어 목을 뺀다. 그래 가끔 그에게 소화해낼 만큼 무른 고기를 준다. 그것에 맛을 들린 난나는 몇 달 전부터 고기를 주지 않으면 아예 밥에 입을 대지 않는다. 사료를 물어 여기저기 흩어놓으며 뗑깡을 부린다. 더 나아가 물도 사료도 거부하며 단식을 한다. 한두 시간이 아니고 하루종일 저 보란 듯이 식음을 전폐한다. 그게 딱해 구운 고기를 두었다가 주고 주고 했었다.

 

근데 요 한 달 전이다.

밤마다 난나가 끙끙대기 시작했다. 어디가 몹시 아픈 모양이었다. 좀은 퀭한 얼굴로 아유! 아유! 하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더니 오줌에 피가 섞여 나왔다. 다음 날 딸아이가 난나를 데리고 늘 가던 병원에 갔다왔다. 요로결석이란다. 육류를 먹은 게 원인이었다고 하더란다. 수술을 권했지만 수술한다 해도 재발확률이 높다는 정보를 주어 망설였더니 수의가 사료만 주라고 하더란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반려동물도 오래 데리고 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파하는 모양이 사람과 너무 흡사하다. 말만 못할 뿐이다. ‘아유, 아퍼!’, ‘어서 빨리 해결 좀 해 줘’, ‘목 말라, 물 줘’, ‘오줌을 못 누겠어, 아파서.’, ‘너무 아프단 말야’, ‘병원 데려가 줘.’ 이런 의사를 모두 눈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서울에 와 산다는 이유로 부모님을 고향 큰조카에게 맡기고 부모님 노환을 수발들지 못했는데, 엉뚱하게도 이 반려견의 노후를 내가 지켜본다. 돌아가신 부모님께는 자식의 도리를 못해 늘 죄를 느낀다. 그렇다고 말 못하는 생물에게 사람의 도리마저 못한다면 그 또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반려견의 생로병사를 처음부터 알았다면 강아지 분양은 막았어야 했다. 이제 와 그걸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만 그간 정이 많이 들었다. 좋은 정도 들었지만 나쁜 정도 들었다.

난나를 분양해온 딸아이는 여러 해를 외국에 나가 유학을 했고, 아내와 나는 직장을 파하고 돌아오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는 이유로 난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밥도 때를 어겨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고, 오줌 똥도 온갖 잔소리를 하며 치워주고, 목욕이며 이발도 때맞추어 시켜주지 못해 몸에서 냄새가 날 때가 많았다.

 

 

난나는, 특히 내게 설움을 많이 받았다.

때로는 성가신 소리도 듣고, 야단도 먹고, 못할 소리도 많이 들었다. 그뿐인가 오줌 똥 때문에 내게 두루마리 화장지 뭉치로 맞기도 했다.

“그 나이에 오줌 똥은 바로 눠야지!”

화장지 뭉치를 등허리에 던지면 서랍장 곁에 가 숨죽여 앉는다.

‘미안해요.’ 그런 표정이다.

그러는 난나를 보면 내 마음이 다시 안쓰럽다. 사람도 글을 배우고, 도덕을 배워도 버릇 고치기가 힘이 드는데 반려견이라고 그 일이 쉽겠는가. 던지면서 생각해도 사람으로서 할 일이 못 됨을 부끄러이 느낀다. 우리 집 난나는 오만 이유로 사랑을 크게 받지 못한다.

 

 

성질을 내다가도 그의 인생을 생각하여 대화를 하고, 그를 각별히 대하기도 한다. 난나가 그런 나를 모르지 않는다. 힘들여 목욕을 시켜주면 제 몸을 내 발등에 비벼 그 고마움을 표하고, 똥을 치우면 치워주는 내 손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며 미안함을 표한다.

그러니까 난나는 미운 정 고운 정을 서로 들이며 한 평생을 사는 우리 식구와 다름이 없다.

우리와 함께 오랜 날을 살았으니 저도 한 식구라 생각할 테고, 제 몸 또한 우리를 닮았을 거라고 생각할 게 분명하다. 가끔 거울 앞에 데려가면 거울 속의 저를 보고 마구 짖어댄다. 그것만 보아도 그는 저의 얼굴을 사람의 얼굴로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가 하는 짓이나 표정이 사람의 그것과 다를 수 없다. 의사소통 또한 원만하다.

 

 

“난나, 이리 좀 와봐.”

난나 몸을 살펴보려고 부르면 내게 조용조용 걸어온다. 제 몸 걱정을 하는, 내 말에 실린 감정을 읽기 때문이다.

“어떻니? 아픈 건 좀.”

하고 물으면 까만 눈으로 나를 빤히 본다. 눈빛이 살아 있다. 많이 좋아졌다는 표시다.

“가끔가끔 시간날 때마다 좀 자렴.”

그러면 알았다는 듯이 제 방석에 가 앉는다.

 

방학이라 자정이 넘어 두세 시에야 다들 잠자리에 들고, 또 새벽 같이 일어나니 난나도 잠이 부족할 테다. 오늘은 난나가 먹기 좋도록 사료도 어린 강아지용으로 사왔다. 그런대로 쉽게 밥을 먹는다. 요즘은 저를 두고 우리끼리 혹 치킨을 먹을 때면 줄 수 없는 사정을 일일이 설명해 준다. 이러저러해서 치킨이 네 몸에 안 좋다니 먹고 싶어도 참으라고. 오래 사람과 살아 그런지 사람 말을 다 알아듣는다. 더 이상 어디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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