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비에 떨어지는 살구들

권영상 2013. 1. 16. 11:32

비에 떨어지는 살구들

권영상

 

 

 

 

여름 장마비가 쉬임없이 내립니다. 한 열흘 내리다가 슬그머니 파란 하늘을 보여주고, 눈 부신 햇살을 한 움큼 마을로 던져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장마비는 그게 아니네요. 제 마음대로 어쩌지 못하나 봅니다. 아마 그쳤다 내렸다 하는 걸 보면 장맛비의 속앓이가 좀 심한 것 같습니다. 제 생각만 같으면 지금이 딱 그쳐줄 때입니다. 너무 이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은 이 열흘쯤 되는 때에 번개불처럼 번쩍하고 파란 하늘을 열어주면 다들 환호성을 지를 겁니다.

 

“하늘은 사람의 마음을 잘 알지!”

하고 말이지요.

그러면서 동쪽이든 서쪽이든 무지개 한 자락을 훌쩍 띄워올려 보세요. 이 많은 도회지, 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할까요. 2층 옥상 위에서, 고층의 회랑을 돌아올라가면서, 아니면 통유리로 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무지개를 보며 손뼉을 치겠지요. 길을 가는 바쁜 사람들도 잠시 가로수 그늘에서 걸음을 멈추고 서서 그 놀라운 빛깔의 무지개를 볼테지요.

“참 놀라운 마술이야.”

그러겠지요.

 

고층 빌딩 위로 뜬 무지개는 아름답지요. 아니 아파트 사이로 뜬 무지개도 좋지요. 전선줄 위에 걸린 무지개도 좋고, 언덕길 위에 불쑥 뜬 무지개도 아름답지요. 무엇보다 좋은 건 우산을 접고 잠시 서서 무지개를 보는 그 짧막한 놀람과 환희와 황홀한 순간의 휴식이 좋잖아요. 그때면 다들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뛰누나!’하며 자신도 모르게 한 시인의 시를 읊조리겠지요.

 

 

그런데 요즘의 하늘은 참을만한 인계점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눈도 퍼붓는다 하면 오지게 퍼붓고, 비도 내린다 하면 지치고 또 지칠 때까지 퍼붓습니다. 요즘은 하늘이 사람의 세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하늘의 일을 걱정해야할 판입니다. 물론 그 일을 사람이 저지르긴 했지만 어떻든 옛 하늘 같지만은 않습니다.

우산을 쓰고 퇴근하여 아파트 마당에 들어섰습니다.

물 고인 마당에 살구가 툭툭 떨어져 있습니다.

고개를 쳐들고 보니 초록 살구나무 숲에서 살구들이 익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살구들이 노랗지 않고 누리끼리하거나 허여멀겋습니다. 물에 퉁퉁 불은 빛깔이며 모양입니다.

 

살구가 그만큼 크려면 봄이 보기 좋도록 꽃이 피었기 때문입니다. 그 꽃이 지고 나서 우리들이 그 꽃의 잔영을 다 잊는 동안 그들은 빛깔 고운 살구를 몰래 익혀나가지요. 그런 살구들의 끝무렵이 이렇게 험하게 끝나갑니다.

나는 살구 한 놈을 주워 들었습니다.

깨어졌습니다. 장마 중에 햇볕 한번 보지 못하고 익은 것들이라 힘이 없겠지요. 깨어지지 않은 살구가 없습니다. 나무를 쳐다봤습니다. 높이라 해봐야 2,3미터 밖에 안 되는 높이입니다. 거기서 여기 이 지상으로 자리를 바꾸어 앉는 높이가 살구에게는 대단히 먼 거리겠지요. 나는 그 살구를 들고 집에 들어가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시가 한 줄 떠올랐습니다.

 

노란 살구가

탈싹, 소리내며 떨어진다.

집어 들고 보니

안 됐다, 톡 깨어졌다.

 

살구나무를 쳐다본다.

조기, 조만한 높이에서

이쪽으로 내려오느라고

그렇게 힘들었구나.

 

우리도 이쪽 세상으로

내려오느라 탈싹, 소리낸 적 있지.

응애 응애 응애, 하고.

 

그러느라 살구처럼

톡, 배꼽이 깨어졌지.

 

나는 책상 위에 놓인 메모지에 이렇게 적어 나갔습니다. 한편의 제대로 된 동시가 되었습니다. 집 밖에서 살구를 보고 생각할 때와 집 안에 들어와 책상 위에 놓인 살구를 볼 때의 내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시는 확실히 한 순간의 번쩍하는 생각과 만나 이루어지는 산물입니다.

세상을 바꾸어 앉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쉽겠나요? 우리들 배꼽에 작은 금이 가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저쪽 세상에서 이승으로 오는 도중에 생긴 상처겠지요. 제목을 ‘톡 깨졌다’로 정하고 보니 그 말이 재미있습니다.

 

이제 장마가 좀 그쳤으면 좋겠습니다.

열매 가진 목숨들이 상처를 입을까 걱정입니다. 이 또한 하늘의 일이니 하늘이 사람의 생각보다 좀 먼저 알아서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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