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에서 씨앗을 보다
권영상
눈 내린 산길을 걸어 우면산에 오른다. 춥다. 오늘 최저 기온이 영하 18도라고 한다. 날씨에 걸맞게 장갑 낀 손마저 시리다. 허벅지와 사타구니로 내리치는 바람이 싸늘하다.
이럴 때 산에 기대어 사는 짐승들은 무얼 먹을까,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눈 여겨 보니 양지쪽 마른 풀섶에서 뭐가 부스럭거린다. 오목눈이새들이다. 종지만한 그들이 풀섶을 뒤지며 뭔가를 쪼아먹는다. 풀씨를 먹는 모양이다.
팥배나무 아래 나무벤치에 앉으려다 보니 빨간 팥배열매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가만히 나무를 올려다 본다. 나무 우듬지에 새가 앉았다. 개똥지바퀴다. 이 가지 저 가지 위태롭게 옮아다니며 가지 끝에 달려있는 팥배열매를 딴다. 이런 추운 날, 새들이 먹을거리가 없어 힘들어할 때를 위해 팥배나무는 그렇게 많은 열매를 열어 삼동을 난다.
새는 저걸 먹고, 먹여준 나무에게 보답을 한다. 멀리로 날아가 적당한데에다 똥을 싸 팥배나무의 유전자를 퍼뜨려준다. 그래서 숲은 늙은 나무 쓰러진 자리에 새로이 어린 나무가 자라 생태의 조절이 된다. 벤치에 앉아 그걸 생각하려니 그 이치에 벗어나는 삶을 사는게 우리 도시인인 듯 하다. 도시인들은 콩을 먹든 옥수수를 먹든, 고구마를 먹든 감자를 먹든, 양파를 먹든 당근을 먹든 먹고 말면 그만이다. 소비적이다. 먹은 것을 살려주는 보은이 없다.
어쩌면 글공부 하나 하지 않은 새들만 못하다. 새들은 열매를 먹어 치우는 듯 하지만 그걸 멀리 운반하여 새 생명으로 살아나게 도와준다. 나무로 볼 때 그런 새가 또 얼마나 고마울까. 나무는 고맙다 하고만 마는 게 아니다. 그 댓가로 열매 속에 살충물질을 넣어두어 새의 위장에 기생하는 것들을 청소해준다. 씨앗이란 참으로 오묘하다.
서울에 살면서 차로 30분 거리에 주말농장을 하면서부터다. 어느 여름 고향 형수님께서 방금 밭에서 딴 거라며 옥수수 한 박스를 택배로 보내주셨다. 그걸 나누어 먹으면서 나는 옥수수 두 통을 따로 두었다.
“고향에서 자란 옥수수니까.”
왠지 고향의 것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나는 예전의 아버지가 그러하셨듯 옥수수를 서로 묶여 베란다 벽에다 걸어두었다. 옥수수 씨를 받을 생각이었다. 그 씨를 받아 다음 해 주말농장에 심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고향에서 자란 것을 서울 변두리에 심어 키워보겠다는 생각은 어쩌면 고향을 옮겨놓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주말농장이라 해봐야 5평 안팎의 손바닥만한 땅이지만 나는 그 이듬해 잘 마른 옥수수 두 통에서 튼실한 옥수수 씨앗 스무 알을 골라 세 알씩 다섯 군데에 심었다. 옥수수는 고추 포기 선 가장자리에 빙 둘러가며 심었다. 여름장마가 질 때 나는 차를 몰고 밭에 갔었다. 탄저병에 고추들이 마구 죽고 있었다. 괴롭지만 그들을 뽑아내고 옥수수 잎에 뚝뚝 떨어지는 음악같은 빗방울 소리를 들었다. 고추가 병 들어 마음이 아프긴 해도 잘 커주는 옥수수가 있어 농사는 지을만 하다. 등산용 비옷을 입고 진 밭을 돌며 옥수숫대에서 딱딱 옥수수를 젖혀 땄다. 몇 통 안 되는 옥수수지만 그걸 따 안고 돌아오는 마음이 뿌듯했다. 그런 기쁨을 얻는 건 지난 해 형수님께서 보내주신 옥수수 덕택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먹거리에서 씨앗을 보기 시작했다.
아직 토종씨앗과 육종씨앗에까지 내 관심이 미치지는 못한다. 단지 배를 불려주는 먹거리를 소비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종자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록 해주어야지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 바탕엔 손바닥만 하더라도 주말농장이라는 땅이 있어 가능했다. 땅은 그래서 사람을 바르게 만든다.
양양 달래골에 손윗동서가 귀촌해 사시고 있다. 매실수 어린 묘목을 심은 빈 밭에 검정콩을 심어 꽤 수확을 하신 모양이었다.
“콩 두 말만 좀 보내주세요.”
콩을 좀 사 드려서 좋고, 산 콩을 가까운 이들과 나누어 먹어서 좋을 것 같아 부탁을 드렸다. 며칠 뒤 택배가 왔다. 굵고 좋은 콩만 보내셨다. 콩자루엔 덤으로 고구마 조금, 마늘 조금, 고춧가루 조금, 북어 몇 마리가 더 왔다. 나는 아내가 콩자루의 콩을 떠 밥에 안치기 전에 콩씨를 할 양으로 굵고 실한 놈 두어 움큼을 커피 빈병에 담아 씨앗함에 넣었다. 거기엔 강릉 큰조카에게 부탁해 얻어온 강낭콩씨가 있고, 쥐눈이콩이 있고, 목화씨, 단호박씨가 들어있다. 그뿐이 아니다. 강릉에서 받아온 수세미씨며 나팔꽃씨, 코스모스, 분꽃, 맨드라미며 채송화, 금잔화 꽃씨도 들어있다.
아빠가 농사짓는 집 애들은
누가 농사짓는 집 애 아니랄까봐
밥을 먹어도
폭폭 떠먹는다.
꺾어 들고 놀던 풀대궁이도
아무데나 버리지 않는다.
꼭 저희 집 두엄더미에다 톡, 던진다.
아빠가 농사짓는 집 애들은
누가 농사짓는 집 애 아니랄까봐
멀쩡히 꽃 구경을 하고도
돌아갈 때는 꼭 꽃씨를 받는다.
친구 집에 가 잠 잘 때에도
-얼른 불 끄고 자자!
즈이 아버지처럼 꼭 그런다.
2009년 <시와 동화>에 실었던 내 동시 '농사짓는 집 애들'이다.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에 와 오랫동안을 살았다 해도 내 몸에 흐르는 피는 속일 수 없는 ‘농사짓는 집 애’다. 가끔씩 그 씨앗 넣어둔 함을 볼 때마다 나는 이 씨앗들을 살려낼 더 큰 땅을 꿈꾸었다.
지난 7,8년 동안 주말농장을 하며 콩도 심고 강낭콩도 심고, 대관령 고랭지 시험장에서 육종한 감자씨도 부탁해 심었다. 내가 이 세상에 와 아이를 낳아놓고 떠나가듯이 내가 먹은 곡물도 이 땅에서 대대로 자손을 키워가도록 해줘야 한다.
지난 IMF 때 우리나라 종묘회사들 대부분이 외국기업에 팔려갔다 한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보는 씨앗도 순 우리 토종씨앗이 아니라 외국기업에서 육종한 씨앗이다. 그들은 돈에 눈이 멀어 한번 재배한 씨앗은 다시는 못 쓰도록 조작을 한다. 이를테면 불임씨앗을 만들어 놓아 씨앗을 채종해 심는다 해도 발아가 안 되거나 된다해도 혈통 전달이 안 되게 한다.
참 다행이지 않은가. 이런 때에 좀 우습긴 하지만 한 도시농사꾼이 씨앗에 눈을 떴다는 것이.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토종씨앗과 육종씨앗의 대결 속에 내가 끼어들기는 나는 아는 게 너무 없다. 단지 씨앗을 통해 우리가 먹고 사는 음식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를 조금 알게 됐다.
예전, 아버지는 씨앗을 받기 위해 텃밭에 이러저러한 것들을 심어두셨다. 늦봄이면 거기에서 피어나던 하얀 종자무꽃, 푸른 파 대가리에 퉁퉁하게 맺혀 피던 파꽃, 눈이 어리도록 노랗게 피던 월동초꽃, 나는 고향의 텃밭을 물들이던 고운 꽃들을 잊지 못한다. 무엇보다 보리타작이나 벼 타작을 마친 마당에서 제일 좋은 씨앗 대여섯 말을 씨앗독에 퍼 담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그런 우리 아버지들의 손이 우리 땅에 크는 곡물을 오늘 날까지 개량해 왔던 것이다. 이것이 곡물을 소비만 하는 도시 사람들과 연년이 씨앗으로 농사를 지어가는 농촌사람의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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