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고사를 지내러 가는 이유

권영상 2013. 1. 10. 00:05

고사를 지내러 가는 이유

권영상

 

 

 

 

“종합운동장 팔각정에서 12일 오전 10시 출발, 참석요”

수업을 마치고 내 방에 와 휴대폰을 여니 문자가 왔다. 고향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보냈다. 멀리 떠나와 사는 관계로 고향 동창회에 자주 못 나갔다. 그래도 강릉에 갈 기회가 있으면 총무를 찾아가 밀린 회비를 내고는 했다. 그러나 참석이 어려운 관계로 꼬박꼬박 내지는 못했다. 그래도 나는 동창회원이다.

문자를 받고 나는 총무한테로 전화를 넣었다.

 

“어, 영상이구나. 나야!”

총무가 대뜸 내 목소리를 알아 들었다.

나는 12일 10시에 출발한다는 문자메시지에 대해 물었다.

“아, 대관령 성황당에 가서 고사 좀 지내려고.”

“고사?”

그 말을 하는 순간 언젠가 총무가 내게 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번에 또 한 명이 갔다야. 동창의 마누라긴 해도 불안해서 못 살겠아.”

  

총무는 고사를 지내러 가는 이유를 설명했다.

초등학교 우리 기수는 다른 기수와 달리 34명, 한 학급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중 벌써 열몇 명이 세상을 떠났다는 거다. 거기다 건강을 잃고 병상에 누워 있는 친구들도 많다는 거다. 총무는 “누구누구누구” 하며 세상을 등진 동창생들의 이름을 일일이 댔다. 누구누구는 고깃배를 타고 조업 나갔다가 풍랑에 영영 돌아오지 못했고, 또 누구는 십여 년 전 연탄가스로 가고, 또 건축기술자 누구는 12층에서 실족사했고, 또 누구는 바람을 피워 달아난 아내 때문에 홧병에 죽고, 또 누구는.......

 

 

“고향을 떠나 가 사는 사람들에겐 좀 우습게 들리겠지만 이참에 성황당에 가 빌어보려고.”

총무가 긴 설명을 끝냈다.

이 좀 묘한 죽음에 약간 섬뜩한 기운이 들기는 들었다.

“아, 그거야. 나이들을 먹고, 또 뭐냐 열심히들 살다가 그런 건데, 빈다고 될 일이야?”

나는 총무를 탓했다. 말로는 그랬지만 솔직히는 그들의 불안해 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는 게 옳다.

“아니야. 뭔 안 좋은 기운이 있긴 있는 것 같애. 다른 기수는 다들 멀쩡한데 왜 우리 기만 그런 일이 유독 많이 일어나냐 이거야. 뭔가 이상하지 않?”

총무가 찝찝해했다.

 

“그 이상하다는 기운이란 게 뭔데?”

“육이오 전쟁이라는 살벌한 기운. 생각해 봐. 전쟁이란 게 아무 때나 나나? 역사적으로 봐도 참 몇백 년에 한 번씩 나는 건데 그 전쟁 와중에 우리 기수 애들이 다들 태어난 거 아니야. 나라 안에 넘쳐나던 그 죽고 죽이는 나쁜 기운이 보통 기운이야? 내 생각만이 아니고 다들 같은 생각이야. 그러니 딴 소리 말고 올라면 내려와.”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전화를 끊고 나니, 총무의 말에 일리가 있는 듯도 했다. 좋은 시절에 태어나면 태어나는 사람도 좋은 시절이 갖는 기운을 받는다고들 한다. 여름이나 겨울보다는 한창 생명이 피어오르는 4월이나 5월 태생들의 인생이 역동적이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들은 그런 좋은 계절은 고사하고, 허구많은 역사의 날들 중에 하필 전란의 시기를 택해 태어났다. 아무리 아니라 해도 그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겠다.

 

 

퇴근 후, 저녁을 들며 아내에게 그 말을 했다.

“아유, 싱겁기는 원!”

아내가 다짜고짜 어이없어 했다.

“당신 생각에도 싱거운 일이지?”

그 순간, 싱거운 일 같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 안에서 일어났다.

“거길 가느니 결혼식에나 가요. 외사촌 형님의 혼사가 이번 일요일에 있댔잖아. 꼭 가야한다고 그러더니만.”

그러고 보니 그 일이 있었다.

 

신랑이 서울 사람이라 서울에서 결혼식을 한다. 그러니 강릉 외가 일가가 모두 올라오실 거다. 때마다 보면 버스로 한 대씩 올라오신다. 서로 반갑게 맞아 그간의 사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나는 아내 말대로 그리로 가기로 했다. 그게 편할 것 같았다. 대관령 성황당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 성황당 앞에 쭉 서서 기원을 드린다는 일 자체가 몹시 ‘안 좋다는 기운’을 우리가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 같았다. 고향 동창들의 일을 방관하는 것 같아 미안하긴 해도 거기보다 이쪽을 가며 그만 그 일을 잊고 싶었다.

 

내달에 단오가 있다.

해마다 갔으니 올해도 내려가게 될 것 같다. 옥천동에서 노암동으로 건너가는 다리 입구에 총무의 귀금속을 다루는 가게가 있다. 위치가 단오장으로 가는 길목이라 만나게 되면 또 만나게 되겠다. 그때에 밀린 회비도 내고, 성황당 일을 어떻게 마쳤는지 좀 물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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