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동, 그 경이로움
권영상
가을걷이를 다 끝내고 나면 아버지는 동녘 울밑 빈 밭을 가셨다. 쟁기질로 이랑을 타고 거기에다 마늘을 심으셨다. 마늘밭 머리에서 훌훌훌 깐 마늘을 바구니에 담아 옆구리에 끼고는 이랑을 타고 뒷걸음질로 심으셨다. 빨간 껍질이 붙어 있는 마늘이거나, 까는 사이에 껍질이 벗겨져 말쑥해진 알마늘들이다. 가을 곡식이 들에서 집안으로 거둬들여질 때 마늘은 그와 달리 집안에서 차가운 들로 나아간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마늘의 그런 독특한 생명작업에 기이함을 느꼈다.
마늘을 다 심고나면 아버지는 그 위에 왕겨를 뿌리거나 외양간 짚거름을 내어 마늘밭을 덮으셨다. 그러고 난 뒷날이면 자연히 마늘밭에도 겨울이 온다. 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리고, 그 눈이 얼고 풀리고, 다시 눈이 내리고, 냉랭한 바람이 몇 번이나 지나가고 멎고.... 마늘밭은 차가운 눈 속에서 죽은 듯이 긴 겨울을 난다.
겨울은 사람에게도 길다.
물론 밤도 길다. 누나와 새로 배운 육백을 치고, 어머니가 읽어주시는 <박부인뎐>을 듣고, 그러고도 밤이 그치지 않으면 오랍들 무구덩이를 헤쳐 서늘한 무를 깎아먹었다. 때로는 메밀을 내어 ‘메물국수’를 해먹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 희미한 등잔불에 책을 읽었다. <장발장>, <십자군의 기사>, <암굴왕>, <로빈후드>, <낙양의 외로운 검객>, <삼국지>…….
그 긴 겨울이 그렇게 거지반 갈 무렵이다.
나는 가끔 울밑 마늘밭에 나갔다. 거기엔 펌프물이 얼지 말라고 해놓은 바람막이 있었다. 나는 거기에 숨어 아버지 담뱃갑에서 몰래 훔친 담배를 배웠다. 아직도 마늘밭엔 눈이 희끗희끗하다. 희끗희끗 눈 쌓인 마늘밭, 암탉들이 헤집어 놓은 자리를 보고 있을 때다. 내 눈에 번쩍 뜨이는 것이 있었다. 송곳처럼 삐죽하니 돋아나온 짙푸른 마늘 촉들이다. 질리도록 흰 눈만 보아오던 때에, 아니 얼어붙은 추운 들판만 보아오던 때에 파랗게 내 눈을 자극하는 마늘 촉은 나를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담뱃불을 부벼끄고 다가가 초록의 마늘 촉을 마주 할 때의 그 경이로움이란!
추운 눈 더미 속에서도 마늘은 잠자고 있었던 게 아니다. 그들은 그 언 땅속에서 생명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겨울이란 만물이 정지하는 계절이 아니다. 생태계의 순환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멈추지 않고 지속되고 있었던 거다.
살펴보면 마늘 촉 돋은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내가 쪼그려 앉은 발과 발 사이에도, 일어서 발을 들어 올리는 그 발밑에도 마늘 촉은 실궂한 대가리를 쳐들고 있었다. 마늘은 그렇게 어두운 땅속에서 생명활동을 하며 해를 넘겼다. 달력을 보면 어느덧 마늘은 두 해를 살고 있는 중이다.
그런 월년생越年生 작물에 밀과 보리가 있고, 시금치가 있다. 우리 토종 배추나 파들도 해를 넘겨 월동을 한다. 그들은 땅을 들떠 일구는 서릿발에 견디고, 냉해에 견딘다. 눈이 한 짐씩 쏟아져 다들 제 빛을 잃을 때에도 그들만은 용렬하도록 푸르다. 추우면 추울수록 더 강렬하게 추위와 대결하고, 밟히면 밟힐수록 더 많이 꺾여 더욱 강건해진다. 그게 월년생 작물들의 뻗쳐오르는 생명의 본성이다.
작물만이 아니다. 곤충들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곤충들은 겨울을 건너지 못해 알을 낳고 죽는다. 유전자를 알속에 남겨놓고 소리 없이 소멸하는 소극성을 보인다. 그러나 몇몇 종들은 맨몸으로 겨울과 대적한다. 그 중에 눈물점메뚜기가 있다. 이들은 아주 오래전 베트남이나 동남아에서 바다를 타고 날아왔다가 겨울에 돌아가지 못하자, 그대로 눌러앉아 비극적으로 월동을 해오는 곤충이다. 주로 나뭇잎더미 속에서, 또는 풀잎 사이에서, 또는 바람을 피할 수 있는 헛간에서 몸을 떨며 떨며 월동을 한다. 몸속의 수분을 최소화하고, 몸이 얼지 않게 부동액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적응력을 키웠다.
그렇기는 해도 그 여리고 힘없는 것들이 견디내던 겨울 추위는 얼마나 혹독했던가. 그들은 그 추위를 견디느라 한없이 울었다. 그때에 흘린 눈물 자국! 그들의 눈 밑엔 지금도 겨울을 참아내느라 울었던 눈물 자국이 있다. 이름하여 눈물점메뚜기.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 그들이 악전고투할 때 그들의 뒤에서 말없이 희생된 개체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우리가 잘 아는 무당벌레나 네발나비도 역시 맨몸으로 우리나라의 영하 30도의 겨울을 지금도 나고 있다. 오리털파카를 입는 것도 아니고, 값비싼 패딩점퍼를 입는 것도 물론 아니다. 바람 많은 들판에서 맨몸으로 처절하게 월동을 한다.
이윽고 이 땅에 봄이 온다.
4월의 들판을 맨처음 초록으로 물들이는 게 마늘과 밀과 보리, 시금치와 월동초다. 어쩌면 이들의 조상이 빙하기 이후 가장 먼저 지구를 푸르게 물들인 건 아닐지 모르겠다.
4월 봄 햇살이 굵어지기 시작하면 마늘포기는 알이 차고, 마늘밭은 푸른빛으로 어우러진다. 밀밭과 보리밭 검푸른 이랑이랑엔 기다리던 종달새가 찾아온다. 종달새의 노랫소리가 청명하고, 이들 작물의 초록빛이 눈부신 것은 다 무엇 때문일까. 월동의 인고 때문이다. 그걸 견뎠기에 봄볕이 내리치는 날 들판에 나서면 세상은 부활절의 축제처럼 월동을 한 이들의 생명을 축복한다.
암탉은 새로 태어난 병아리를 데리고 마늘밭에 들어가 마음껏 비옥한 땅을 파헤쳐대고, 밀과 보리밭엔 사람들 눈을 피해 종달새가 들락이며 짝짓기를 했다. 눈이 맞은 사내와 여자도 정념을 견디지 못해 보리밭을 깔고 누워 정사를 했다. 겨울을 이겨낸 보리밭엔 그런 충만한 정사의 에너지가 있다. 그러기에 보리밭 근처에만 가도 술에 취하듯 강한 정념에 감염된다. 마늘과 파의 성질 또한 그렇고, 시금치 역시 그렇다. 살아남은 것들의 몸은 다 건강하고 환희롭다.
사람에게도 월동이 있다.
사춘기에 겪는 성장통이 그것이며, 자식을 낳아 기르고 가정을 먹여 살리는 고충도 어찌 보면 월동의 아픔에 비견할 만하다. 요즘 심각하게 대두되는 직장의 은퇴와 은퇴 이후의 생존을 위한 악전고투도 생물들의 눈물겨운 월동과 다름없다.
월동이란, 겨울이라는 혹독한 강을 건너 저쪽 봄의 계절로 이동하는 일이다. 인생을 살아오며 우리는 삶의 고비고비를 숱하게 넘어왔다. 나를 위로하고 때로 나를 다독이면서. 그것이 결국엔 나를 속이는 일인 줄 알면서도 우리는 내 앞에 닥친 고비를 또 그렇게 넘어 여기까지 왔다. 마음의 봄을 잃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는 모두 곤궁하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살아내는 까닭은 저 만큼 봄이 있다는 걸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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