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어를 보면 슬픔이 인다
권영상
토요일이다. 아침 요구르트를 한 컵 만들어 먹는데 휴대폰이 울었다.
“아직도 출발 안 하고 계시네!”
충북 음성에 사는 셋째조카다.
빙어 낚시를 하러 오라고 재촉이다. 전화는 지난 월요일부터 왔었다. 얼음 녹기 전에 빙어 안주에 소주 한잔 먹고 가라고. 빙어라는 말에 나는 아무 생각없이 한번 가마, 하고 대답해 버렸다. 그냥 뭐 인사삼아 하는 전화려니 했다. 그랬는데 조카는 나와 달랐다. 진심으로 내려오라고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그냥 ‘한번’이 아니고 얼음판에서 낚시질한 빙어로 소주 한잔 꼭 하고 가라는 말이었다.
그러고 이틀이 지난 목요일이었다. 저녁에 또 전화가 왔다. 몇 시에 올 거냐고. 그제사 전화기 저쪽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이게 인사치레로 한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하고는 얼버무려 끊었다. 음성이 충북이니까 충북까지 가야한다고 생각하니 그 길이 아득히 멀기만 했다. 내가 말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못 가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조카는 막무가내였다.
“한번 오겠다고 약속했으니 오셔야지요!”
머뭇거리는 내게 책망하듯 재촉을 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알았다. 그럼, 오후 1시 버스를 타고 가마.”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
12시에 점심을 먹고 동네에 있는 남부버스터미널에 가 음성행 버스를 탔다. 딱 1시간 30분만에 무극터미널에 버스가 닿았다. 약속대로 셋째조카가 차를 가져와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이면 올 수 있는 길인데 뭘 그리 망설였어요.”
차에 오르자, 그러며 나를 데리고 가까운데 있다는 사정리 저수지로 향했다. 큰 산줄기 사이에 놓인 저수지였다. 둘레가 걸어 4킬로미터는 될 듯 싶었다. 파랗게 언 빙판 위에 6,70명의 사람들이 무덕무덕 모여 빙어낚시를 하고 있었다.
나도 얼음판에 내려섰다.
두껍게 언 얼음구멍을 깨고, 그 안에 낚시를 드리운 사람들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대여섯 살 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얼음구멍 하나 빤하게 뚫어놓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낚시를 드리우는 모습이 또한 정겨웠다. 값 나가는 큰 물고기도 아닌, 기껏 5,6센티 밖에 안 되는 어린 빙어를 잡겠다는 그 생각들이 어찌 보면 해학적이다.
아침부터 낚시질을 한다는 한 아저씨의 페트병엔 빙어 대여섯 마리가 한가하게 놀고 있다. 나는 그만 웃음질을 쳤다. 웃으며 생각해도 참 우습다. 비경제적이고, 무모할 만큼의 이런 수고가 반짝이는 빙어처럼 순수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어린 빙어 몇 마리를 잡자고 토요일을 허비하는 이 사람들이 진정 참다운 사람같아 보였다. 지금 도시에 살고 있는 어떤 프로들은 이 순간에도 몇 백 몇 천만원씩의 거금을 챙기고 있다. 거기에 비한다면 이들의 수고는 10원어치도 안 되나 오히려 깨끗해서 좋았다.
“얼음장이나 한 바퀴 돌아보자!”
빙어낚시를 하자는 조카의 손을 이끌어 당겼다. 빙어를 잡는 이들의 표정을 보러 다니는게 더 흥미로울 것 같았다. 우리는 미끄럼을 탔다. 조카나 나나 고향인 경포호수에서 얼음지치기를 같이 하며 어린 시절을 컸다. 손을 잡기도 하며, 스케이트 타는 시늉을 내기도 하며 쉭쉭 얼음판을 돌았다.
버드나무 밑에 얼음 구멍을 지키고 앉은 아이에게 다가갔다.
“점심 먹고 왔는데 여태 두 마리 잡았어요.”
가까이 가는 나를 보자, 그러면서 “기다리는 걸 배우고 있어요.” 한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나 하니?”
나는 어른이나 씀직한 그 어마어마한 말을 들으며 물었다.
“기다리지 않고는 잡을 수 없다는 말요.”
그러며 방한복에 붙은 모자를 꾹 눌러쓴다.
“그래. 공부 많이 하는구나!”
이번엔 갈대숲 근처에 웅크리고 앉은 노인에게로 갔다. 물그릇 안에 잡은 빙어가 백여 마리는 됐다. 시린 햇빛이 닿기만 해도 은백색의 투명한 몸뚱이가 눈부시게 반짝인다. 같은 저수지, 불과 대여섯 발자국 거리인데도 잡히는 게 이렇게 다르다. 그러나 옆 자리 사람이 백여 마리를 잡았대도 누구 하나 시기하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좀 부러워는 하겠지만 그걸 가지고 초조해 하지 않는다. 그냥 받아들인다. 그들의 표정은 다만 즐거울 뿐이다. 하긴 그 백 마리 빙어래봤자 붕어 한 마리 크기만도 못하다. 그래서 그럴까 대여섯 마리 잡아놓고도 초연하다.
나는 목도리로 머리를 둘둘 감고 앉은 아저씨 곁에 갔다. 그이 곁에 앉을뱅이가 있다. 판자 밑에 두 개의 다리를 깔고 그 밑에 쇳날의 세운. 나는 주인의 허락을 받고 송곳째 빌려 무릎을 꿇고 앉아 송곳질을 했다. 날은 필경 옛날의 것보다 좋으나 나가지 않는다. 옆에서 웃던 조카가 내 두 어깨를 민다. 제법 잘 나간다. 저만큼 가서는 이번엔 조카가 타고 내가 밀어주었다. 이러던 때가 무려 40여 년 전이다. 타고 밀면서 우리는 서로 웃고 손뼉을 쳤지만 마음 한 구석에선 오래된 추억 때문에 마음이 아렸다. 일찍 엄마를 잃은 조카도 그렇고, 나이 차이라고 별로 없는 삼촌인 나도 그때에 대한 기억이 있고.
우리는 손을 잡고, 또는 미끄럼을 타며 반쯤 저수지를 돌아 다시 처음 장소로 왔다. 거기엔 임시 노천 가게가 있었다. 살아있는 빙어도 팔고 소주도 파는.
빙어와 소주를 시키자, 양푼만한 그릇을 내왔다. 들여다 보니 물 담긴 그릇 안에 살아있는 빙어들이 마구 헤엄치고 있었다. 손으로 움켜잡아 초고추장을 찍어 먹으라며 주인남자가 먹는 법을 알려줬다. 몇 번 먹어본 조카가 그렇게 해 보였다. 나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대신 젓가락을 넣어 집어봤다. 작고 몸놀림이 빨라 집을 수 없다. 그래도 간신히 한 놈을 집어 초장을 찍어 얼른 입안에 넣었다. 빙어가 입안에서 파닥인다. 나는 눈을 감고 어금니를 눌렀다. 가만 눌렀는데도 바삭, 빙어 몸이 부서진다. 빙어를 먹으러 왔다는 이유로 세 번을 그렇게 먹었다. 그 후부터 씹는 일이 미안했다.
저항 한번 못하고 부서지는 빙어를 목 너머로 넘겨 보내는 내가 잔인했다. 유리처럼 맑은, 초저녁 달빛처럼 여린 놈이 살겠다고 물그릇에서 이리저리 달아나는 걸 보고는 도저히 먹을 배짱이 안 생겼다. 값싼 휴머니즘을 떠나서 근본적으로 좀 애처롭고 가여웠다. 나는 단무지를 안주 삼아 소주 서너 잔을 마셨다. 생각할수록 슬픈 녀석이 빙어다.
빙어는 본디 고향이 바다다. 이들이 강이나 호수 가까운 바다에 살다가 이른 봄이면 산란을 하러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게 올라갔다가 그만 호수나 강에 갇혀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채 거기에 눌러살아온 바다빙어목에 속하는 어류가 빙어다. 이들은 고향바다를 그리며 살아온 슬픈 냉수성 물고기다. 그래서 더운 여름엔 저온인 물 밑바닥에, 추운 여름엔 차가운 물 위로 올라와 산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빙어는 타향인 내륙에 들어와 타관살이를 한다. 그런 점에서는 고향을 떠나 수십 년을 객지에서 떠도는 내 마음의 외로움과 다를 바 없다. 나도 이 빙어처럼 고향의 풍습을 버리고 서울 땅에 와 사느라 서울의 삶에 익숙해졌다. 충청도에 와 사는 조카의 말속에도 알게 모르게 충청도 말이 섞여 있다. 우리는 이렇게 고향의 것을 하나 하나 버리며 객지 풍습에 길들여져 여기까지 왔다.
얼마나 투명한지
햇빛 내려설
모서리조차 없다.
그런
유리쪽 같은 몸에
어쩐지
깊은 슬픔이 인다.
나는 빙어를 들여다 보며 휴대폰 메모장에 시를 하나 적어 가지고 왔다. 꽃게도 먹고, 퍼덕이는 가자미도 광어도 칼 끝에 죽어나는 걸 보았으면서 그 어린 빙어 몇 마리 먹은 일에 속이 쓰렸다. 세속에서 너무 사람 노릇 못하며 살았다는 뜻이겠다. 그래서 ‘악어의 눈물’처럼 빙어를 삼키지 못하는 거겠지, 했다.
“충청도 어느 산속 저수지에 유리쪽만치 맑고 어린 빙어가 산다.”
나는 살아가며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우리가 사는 이 거대한 문명체의 어느 한 모퉁이에 얼음이 풀리면 물밑 깊은 데로 숨어들어 그 존재감마저 희미해지고마는 어린 빙어. 살아가며 내가 문명에 깜박깜박 젖어들 때마다 이 힘없는 빙어를 떠올리며 글을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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