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숙씨, 졸업하다
권영상
“이거 뭐라고 쓰면 좋을까?”
산에 가려고 옷을 챙겨 입는데, 아내가 식탁의자에 앉아 부른다.
“뭔데?”
아내가 고민하는 표정이다.
“내 친구 봉숙이, 중학교 졸업해.”
“봉숙씨 딸이?”
“아니, 봉숙이.”
“대학이 아니고?”
“중학교. 중학교 졸업.”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봉숙씨가 학교에 다닌다는 말은 들었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내 친구니까 나이로 친다면 쉰 중반이다. 쉰 중반 나이에 다른데도 아니고 중학교 졸업이라니! 어떻든 ‘쉰 중반의 나이’와 ‘중학교 졸업’이 얼른 연결이 안 됐다.
“언제?”
“칠일.”
7일이면 내일모레다.
“오늘 봉숙이네 결혼식이야.”
“봉숙씨가 가?”
“아니, 봉숙이 딸.”
중학교 졸업을 했다니 봉숙씨가 결혼해야 옳을 것 같았다.
나는 웃으며 아내 곁으로 갔다. 아내는 두터운 책, 속 페이지에다 뭔가 좋은 축하 글을 써주고 싶은 모양이다. 볼펜을 집어들고 내 도움을 청한다.
“결혼식 가는 김에 졸업 축하 선물을 주려고.”
봉숙씨는 아내의 말을 통해 들어온 아내의 시골 초등학교 동창생이다. 초등학교 친구 중엔 서울에 올라와 사는 이가 십여 명이 된다. 그중에서도 봉숙씨는 결혼을 잘 했다. 남편도 훌륭한 분이고, 아들딸도 반듯하게 잘 키웠다. 그 딸이 오늘 결혼한다. 정부 기관인 모감독원에 다닌다.
“무슨 책인데?”
마땅한 글귀가 생각 안 나 책이름을 물었다. 아내가 책을 들어올려 보인다.
<연을 쫓는 아이>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하는 할레드 호세이니의 성장소설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미르와 같은 친구이기도한 하인인 하산. 아미르가 12살 때 연을 날리던 날 자신 때문에 하산은 동성의 사내녀석들에게 몸을 다친다. 그 후, 미국에 망명한 아미르는 하산에게 진 죗값을 치루기 위해 탈레반 치하의 고국으로 돌아가 그를 찾는다. 우정과 비밀과 배신이라는 과거의 부끄러움에 짓눌려 살아가는 자전적 이야기다.
“어렵게 졸업하는 데 뭐 좋은 문구 없을까?”
아내가 뜸을 들이는 내게 다시 물었다.
“글세, 뭐 형설의 공. 이런 말이 좀 들어가야하지 않을까?”
고리타분한 말이긴 해도 봉숙씨의 졸업엔 그런 말이 좀 어울릴 것 같았다.
쉰 중반의 나이에 중학교를 졸업하자면 시련이 없지 않았을 테다. 지금은 남편도 잘 알려진 대기업의 이사로 누구 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그래도 그 나이에 학업을 할 때에는 그런, 반딧불이의 힘을 빌릴 만큼의 그 누군가의 공이 있었을 것 같았다. 그게 가족들이건 아니면 본인의 의지이건 간에.
<형설의 공을 받들며 졸업하는 내 친구>
아내가 볼펜으로 그렇게 썼다.
그리고 그 밑에다 작은 글씨로 ‘계속 공부하여 대학도 나오고 대학원도 나오길!’ 이라고 썼다.
“봉숙이가 책 읽기를 좋아해서 책을 선물하는 거야.”
아내가 볼펜을 놓으며 책을 덮는다.
나이 쉰 중반의 친구에게 소설을 한권 선물하는 아내와 그 봉숙씨 사이가 멋져 보였다. 그 나이쯤이면 돈 냄새 나는 그럴듯한 외제가방이나, 외제 화장품, 아니면 고가의 악세서리를 고를지 모른다. 그런데 시력도 떨어져갈 나이의 친구에게 책 선물을 한다는 게 순수하고, 또 그런 사이가 부럽기도 했다.
나는 10시쯤 예식장으로 가겠다는 아내를 두고 집을 나섰다.
가끔 텔레비전 <인간극장>에서 예순이나 칠순의 어른들이 야간학교에 다니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아직도 저런 학교가 있고, 저런 어른들이 있나 했다. 그 나이에 에이비씨를 배워 뭣하고, 방정식을 풀고, 화학 원소기호를 외면 뭘 할까? 그랬다. 그러면서 ‘아, 인간극장이니까.’ 그러고 말았었다.
중학 공부를 못한 이들의, 공부에 대한 목마름을 우리가 제대로 알 리 없다. 그까짓 중학교 공부 없이도 그들은 험난한 인생을 누구보다 잘 견뎌 왔다. 좋은 남편을 얻고, 자식을 훌륭히 키워냈고, 그러고 누구 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다. 그럼에도 그분들이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건 어쩌면 과거 어느 한 시기의 결핍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과거를 산다.
어느날 텔레비전 '방송대학' 채널을 켰을 때다.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60대의 사내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여행용 가방을 끌고 방송대학 교정으로 들어서는 장면이 나왔다. 그는 방송통신대학 3학년생이었다. 그의 여행용 가방 속엔 일어공부와 관련된 책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일본어과 학생이었다. 왜 이 나이에 학교를 다니느냐고 물었다. 그는 웃으며 대답을 시작했지만 결국엔 울었다.
“어린 시절입니다. 집이 넉넉지 못한데다 형이 공부를 해야했기에 나는 중학교도 절반만 나가 공부를 하다 결국 그만 두었지요.”
그는 거기에서 눈시울이 붉어지도록 눈물을 흘렸다.
사람은 오래된 과거를 가지고 미래를 산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려는 미래라는 것도 알고 보면 오래된 과거다. 사람은 아픈 과거를 가지고 현재를 살고, 아픈 과거를 가지고 미래를 산다. <연을 쫓는 아이들>의 주인공 아미르가 그렇고, 봉숙씨가 그렇고, 머리 희끗희끗한 어느 대학의 늙은 학생이 그렇고, 우리의 삶이 그렇다. 인연에서 벗어나지 못하듯 우리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쩌면 과거란 지금 내가 이 험난한 세상을 버텨낼 수 있는 가장 큰 배경이다. 산을 오르며 봉숙씨가 고등학교도 마치고, 대학도 거뜬히 마치기를 기원한다.
요즘이 졸업시즌이다.
요즘의 아이들에게 있어 졸업은 어떤 의미일까.
2018년에 가면 초등학교 입학생수와 대학정원수가 같아진다고 한다. 그냥 가만 있어도 대학가는 건 문제없다. 조만간 고등학교도 의무교육에 무상급식이 될 모양이다. 이젠 아무리 공부가 싫어도 강제로 고등학교까지 의무적으로 다녀야한다.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멍에를 어른들이 씌운다.
태어나 서너 살 적부터 유아원과 유치원, 학교와 학원을 쉴 새 없이 전전하며 사는게 요즘 우리나라 아이들이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공부의 지겨움와 경쟁의 지겨움을 견뎌내야 한다. 우리나라 교육 상황에 잘 적응하는 체질의 아이들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게 우리나라는 결코 천국이 아니다. 공부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노는 토요일이나 방학은 형벌같은 선물이다.
봉숙씨가 다니는 학교의 졸업식에 한번 가보고 싶다.
왠지 그 풍경이 눈물겨우면서도 행복할 것 같다. 늦은 나이에 배우는 그분들의 공부는 경쟁이 아니었을 테다. 서열을 매기기 위한 것도 아니었을 거고, 먹고 사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도 물론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러기에 그분들의 졸업식도 오늘의 아이들 졸업식과 다르게 무척 아름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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