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를 후원하며
권영상
부산에 지인이 있다.
본디 대구 태생이지만 직장이 거기다 보니 거기서 결혼하고 거기서 자식들을 키우며 산다. 처음에는 퇴직한 그를 위로하기 위해 전화를 했는데, 요사이는 안부 삼아 한다.
어제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우크라이나 전쟁 이야기가 나왔다.
“갑자기 돈이 좀 생겼는데, 이걸 우쩔까 하다가.”
그가 뜻밖에도 그 우연히 생긴 돈을 우크라이나 전쟁 후원금으로 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가 부러워졌다. 나는 왜 살면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이근 대위라는 분이 그곳에 가 국제의용군으로 활동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기껏 속으로만 박수를 쳤다.
솔직히 나는 보수적인 틀속에 갇혀산다. 그런 점에서 부산에 사는 지인도 부럽고, 이근 대위, 그분의 자유로운 삶도 부럽다. 그분이 법을 어기고 갔다고는 하지만, 이웃나라 국경을 쳐들어가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고, 남의 평화로운 일상을 깨는 누군가의 나쁜 짓에 분노하여 달려간 그가 의로울 뿐이다. 우리에게 만약 그런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세상에 낯을 들고 나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는 이 하나 없고,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전장터에 달려가는 그 자유로운 영혼의 값이 어쩌면 오늘 우리나라의 무게와 대등하지 싶다. 말로만 소득 3만불을 외친 우리의 허세도 다행히 그분이 있어 덜 부끄럽다.
나는 6.25 전란 중에 태어났다.
포 소리가 울리고, 총소리가 들리는 밤에 그 소리를 다 들으며 태어났을지 모른다.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집에서, 길에서, 학교에서,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사람이 다치고 죽어나가는 참혹한 전쟁 이야기를 수없이 들으며 컸다. 전쟁이야기는 그 당시 거의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다. 미국에서 보내왔다는 구호물자가 강원도의 시골 마을 우리 집까지 찾아왔다. 초등학생인 나에게 차례 온 것은 푸른색 남방셔츠였다. 어린이용이라고 했지만 어른이 입어도 좋을 크기였다.
나는 그 남방셔츠를 입었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 교실의 웬만한 아이들은 다 그 구호물자용 옷을 입고 다녔다. 길이와 품을 수리한, 탁 보기에도 우리 옷이 아닌 그 옷을 너남 없이 입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부끄러움 보다 전후 10년도 채 안 된 때였으니 당장 급한 게 의식주였다.
전쟁은 그렇게 끝난 듯 했지만 끝이 아니었다. 풀숲에 떨어진 불발탄을, 매설된 지뢰를 건들다가 다치고 죽는 사람들이 자꾸 생겨났다. 그뿐이 아니다. 북에서 내려온 누군가가 뿌렸다는 불온 ‘삐라’를 줍고, 그런 걸 주우면 신고하라는, 소형 비행기가 뿌리는 ‘삐라’를 그 푸른색 남방셔츠를 입고 달려가 나는 주웠다. 전쟁은 없었지만 전쟁 같은 소년기를 살았다.
그때, 그 누군가가 보내준 푸른색 남방셔츠를 입고 자란 소년이 지금 밥을 먹고 살만한 어른이 됐다. 부산에 사는 지인 역시 어쩌면 그런 아픈 기억이 있어 후원했을지 모른다.
휴대폰 금융이체를 할 줄 모르는 나는 은행을 찾아가 입출금지급기 앞에 섰다. 잠시 이국의 한 소년을 생각했다. 그 소년 역시 그 옛날의 나처럼 푸른색 남방셔츠를 입고 학교를 다니며 끝내 전쟁의 상처를 잊게 되기를 바랐다.
은행을 돌아나오며 그 옛날, 알지도 못하는 동방의 나라에 어린이용 남방셔츠를 보낸 이국의 또 한 분을 생각한다.
<교차로신문> 2022년 6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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