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등뻐꾸기의 섬뜩한 생애
권영상
불을 끄고 누웠는데, 건너편 산에서 뻐꾸기가 운다. 검은등뻐꾸기다. 이슥한 5월 봄밤의 자정, 뻐꾸기 소리가 산을 울리고, 마을을 울리고 방안을 찡 울린다. 잠시도 쉬지 않는다. 지금은 세상이 모두 잠든 시간인데 뻐꾸기만 홀로 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다락방에 올라간다. 건너편 산 쪽으로 난 창문을 연다. 보름 어간이라 달빛이 낮처럼 환하다. 길 건너 고추밭이며 마을집들이 손금을 보듯 환한 밤, 건너편 참나무 숲엔 검은등뻐꾸기가 잠들지 못하고 있다. 검은등뻐꾸기의 울음은 밤이어도 들어보면 안다. 한결같이 네 음절로 반복해서 운다.
저것이 이 이슥한 밤에도 잠들지 못하고 우는 까닭이 뭘까.
검은등뻐꾸기는 대만이나 필리핀 그쯤에서 월동을 하고 우리나라로 찾아오는 여름 철새다. 그가 찾아와 울면 5월 중순이고, 그가 울면 모내기도 끝난다. 들판이며 숲이 한적한 5월, 검은등뻐꾸기는 사람과 달리 지금 바쁘다. 잠시 우리나라에 들렀다 가는 그의 산란시기가 5월이기 때문이다. 알을 낳고 서너 달을 머물다 떠나야 하는 그들에게 있어 이 땅에 사는 시간은 몹시 짧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짝을 만나야 한다.
다른 새들이라면 짝을 만나 함께 둥지를 틀고 산란을 하고 함께 새끼를 부양하련만 저들에게는 부양 본능이 없다. 기껏 남의 둥지를 찾아다니며 저들의 알을 몰래 위탁하는 게 전부다. 한 둥지에 하나만 낳아야 하니, 알 열두 개를 낳자면 열두 개의 남의 둥지를 기웃거리며 도둑처럼 탁란해야 한다.
다들 알다시피 저들은 숙주인 뱁새나 멧새, 오목눈이 둥지에 몰래 알을 낳는다. 그걸 모르는 숙주들은 검은등뻐꾸기 알을 정성껏 품는다. 알에서 일찍 깨어난 검은등뻐꾸기 새끼는 저 혼자 살아남기 위해 숙주들의 알을 둥지 바깥으로 떨어뜨린다. 그리고 성장하면 안녕이란 인사도 없이 둥지를 떠난다.
자정이 넘은 이 시간에도 저렇게 우는 건 무엇 때문일까. 단순히 짝을 만나기 위해서일까. 아무리 다급하기로 자정이 넘도록 저렇게 구애에 힘쓸까.
창문을 닫고 내려와 그만 잠자리에 든다.
이른 아침, 검은등뻐꾸기 울음소리에 다시 잠에서 깼다.
참 지치지 않고 운다. 저것이 저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운 지 벌써 열흘도 더 된다. 가만히 누워서 들으려니 울음소리가 이쪽 내가 사는 마을로 건너온다. 마을 뒤편 어디쯤에서 울더니 어디론가 날아간다. 울음소리가 아득히 사라진다.
저것은 한 자리에서만 우는 게 아니다. 누군가를 경계하듯 이 근방을 울며 날아다닌다. 짝은 이미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밤은 물론 낮에도 근방을 촘촘히 경계하듯 울며 날아다니는 데엔 이유가 있을 듯하다.
저와 같은 동족 때문이다.
검은등뻐꾸기는 숙주들의 알을 모두 제거하고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자신들의 생태 본능을 안다. 만약 제가 알을 낳아놓은 숙주의 둥지에 동족의 누군가가 또 알을 낳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 이후의 사태는 불을 보듯 뻔하다. 먼저 부화한 뻐꾸기 새끼가 그 둥지의 알을 모두 둥지 밖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공교롭게도 뻐꾸기 새끼 두 놈이 똑 같은 시간에 부화한다 해도 문제다. 덩치 큰 두 마리의 새끼를 몸집 작은 숙주들이 먹여살릴 가능성은 전혀 없다. 결국 남는 건 죽음뿐이다.
지금 검은등뻐꾸기는 그게 두려운 거다. 그 때문에 자신의 영역 안으로 동족의 누군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밤낮없이 접근 불허의 경고장을 날리는 것이다. 잔혹한 본능을 아는 저것들의 야릇한 생태가 소름끼친다. 무엇보다 그런 사실도 모른 채 부부애를 발휘하여 남의 새끼를 키우는 뱁새와 오목눈이들의 삶에 연민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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