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버무리떡의 풍미
권영상
그때 아내는 툭하면 나를 데리고 쑥 캐러나가려고 했다.
나는 벼라별 핑계를 다 댔지만 추운 바람을 맞으며 쑥 캔 날짜가 적잖다. 캐 온 것으로 쑥국도 만들고, 덕어서 쑥차도 만들었다. 그 후, 봄은 한정없이 저절로 깊어갔다. 모란이 피고 졌고, 창포가 푸르게 피어선 속절없이 졌다. 지금은 함박꽃이 피려 피려 하는 중이다.
“저녁에 쑥버무리떡 해 볼 거야.”
인터넷을 뒤지고, 유튜브를 뒤지던 아내가 이것저것 준비에 들어갔다.
“당신은 대충 다듬은 이 쑥을 씻어주면 좋겠어.”
아내가 냉동실에 넣어둔 쑥을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군말없이 그걸 받아들고 마당 수돗가로 나갔다. 커다란 대야에 쑥을 담아 수돗물을 튼다. 쑥이 그때 그 논두렁에서 캐던 싱싱한 쑥으로 파랗게 되살아난다. 다듬고 씻기를 반복 하는데도 도무지 싫지 않다. 저녁에 먹게 될 쑥버무리떡 때문이다. 쑥버무리떡이 뭐 별건가, 하면서도 쑥과 쌀가루를 버무리는 그 버무림이란 말이 좋아 괜히 떡도 기대된다.
어린 시절, 가끔 어머니는 쑥버무리나 쑥버무리떡을 해주셨다.
그 때 먹어본 이후, 쑥버무리란 말을 처음 해 보는 것 같다. 그 이후 먹어본 적이 없었으니 당연히 그 말을 쓸 리도 없었겠다. 쑥버무리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하나 쑥버무리란 말은 왠지 가깝게 들린다. 식구가 많던 그 무렵의 겨울과 봄 사이는 늘 배고팠다. 양식의 여유가 있든 없든 다들 배고프게 살았다.
쑥버무리는 주로 찹쌀가루에 버무린 것을 대솥밥을 지을 때 함께 쪘다. 어머니가 어떻게 만드시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밥그릇에 올라온 쑥버무리엔 밥이 묻어있었다. 함께 묻어온 밥알과 찹쌀가루가 익어 쫀득거리던 식감과 쑥이 풍기던 봄 냄새.
어린 시절엔 겨울도 길었다.
무료하게 가는 겨울이 길어지면 어머니는 뭉쉥이를 하셨다.
뭉쉥이란 고향 지방에서 쓰는 말인데 일종의 백설기다. 백설기와 다른 점은 쌀가루에 곶감이나 호박오가리를 버무려 넣어 풍미를 돋운 떡이다. 우리 음식은 버무리면 풍미가 난다. 쑥버무리 호박버무리가 그렇고, 사과버무리가 그렇다. 반찬류는 다 버무린다. 배추에 김치소를 버무리는 게 그렇고, 잡채를 맛있게 만드는데도 버무리는 솜씨가 요구된다. 생선회를 야채와 버무리는 것이며, 산나물 들나물 또한 된장에 버무려야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서로 섞여야 맛을 내는 게 우리 음식이다.
쑥을 깨끗이 씻어 거실에 들어오자, 아내는 그 사이 곶감을 잘게 썰었고, 지난 가을에 말려둔 호박오가리를 손질해 물에 불리고 있다. 곶감도 넣고, 호박오가리도 넣으려는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만든 쑥버무리 떡이라면 당연히 쑥버무리보다 맛있다. 물씬해서 좋다. 곶감과 호박오가리가 들어간 쑥버무리 떡의 달큼한 풍미는 그야말로 버무림의 산물이다.
아내가 씻어온 쑥에 찹쌀가루와 곶감 썬 것과 호박오가리 버무리는 걸 지켜본다. 수십 년 전, 어린 시절에 먹어보았던 기억이 입맛을 핑 돌게 한다.
“20분 뒤면 먹을 수 있어.”
방으로 들어가는 내 등 뒤에다 대고 아내가 말한다.
자, 이제 방정리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면 쑥버무리 떡을 먹을 수 있겠다. 무엇보다 시골 토종음식을 만들어보려는 아내가 있기에 이런 기쁨도 가능한 듯 싶다.
<교차로신문> 2022년 5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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