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아쉬운 작별이 있는 후문

권영상 2022. 6. 15. 10:20

 

아쉬운 작별이 있는 후문

권영상

 

 

 

일이 잘 되는 중에 전화가 왔다. 아내다. 10분 뒤 전철역에 내릴 테니 데리러와 달란다. 전철역까지 가려면 10분쯤 걸린다. 바깥옷으로 갈아입고 서둘러 집을 나선다. 초여름날의 오후 8시 반은 어스름하다. 전철역이 가까운 쪽은 후문이다.

 

 

관리소를 지나 도라지밭 사이로 난 소로를 걸어 후문으로 향한다. 우련한 등불빛이 어룽대는 후문에 껴안고 있는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인다. 정문으로 돌아가기엔 멀다. 나는 숨소리를 죽이며 그들 곁을 지난다. 장미 덩굴을 올린 아치문에 기대어 선 그들은 아무래도 나를 의식했겠다. 껴안은 몸을 풀지도 못한 채 꼼짝 않고 있다. 괜히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걸음을 빨리했다. 후문 바로 건너편은 빵가게고 그 옆은 헤어숍이다. 가게 불이 아직 있으니 으슥한 곳은 분명 아니다.

후문을 나온 나는 엄청 바쁜 사람처럼 서둘러 걸었다.

 

 

걸으며 생각하니 그들의 따뜻한 포옹이 부럽기도 하고 또 멋있기도 하다.

아파트 정문은 대로와 가까우니 대개 승용차가 드나들고. 걸어다니는 이들은 그리 많지는 않아도 대개 후문을 이용한다. 후문이 좋다. 활짝 개방된 정문과 달리 여닫는 문이 있고, 또 좁은 길이 좋다. 거기다가 전철역으로 가는 길이 가까우니 좋다. 그러나 무엇보다 비교적 사람 발길이 뜸한 뒤쪽이라 호젓해 좋다.

아파트 마당을 나서서 후문으로 가려면 관리소 뒤의 대추나무 숲길과 도라지 밭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 그 끝에 후문이 있다. 직장을 출퇴근 하며 몇 번 겪었지만 그 후문에서 가끔 젊은 연인들의 아쉬운 작별을 보곤 했다.

 

 

그 연인 중의 여자 아이가 어쩌면 우리 아파트에 살고 있을 것 같다. 매너 좋은 남자친구가 여자 친구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곳이 이 후문이다. 아직 부모에게 소개시킬 사이는 아니니까 그냥 이쯤 후문에서 작별을 하는 거겠다. 남자 친구의 집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여기까지 동행해준 그를 그 먼 곳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일은 그가 누구라도 미안할 테다. 그런 마음에 한 번 더 긴 포옹을 하고 헤어지는 거겠다.

 

 

그 마음 나도 안다. 7년을 사귄 끝에 아내와 결혼하였으니 지금 그들의 마음을, 이만큼 나이 먹었다고 모를 수 없다. 그런 아빠의 과거사를 듬성듬성 듣고 자라 그런지, 딸아이도 가끔은 아파트 후문에서 남자 친구와 헤어진다는 말을 아내를 통해 듣는다. 밤이 좀 늦어 헤어질 때면 후문까지 남자친구가 데려다 준다고 한다. 그런 날은 또 그냥 보낼 수 없어 후문 근방에서 맥주를 잠깐 마시는 걸로 미안함을 대신하기도 한단다.

 

 

후문이란 그러기에 딱 좋은 곳이다. 집에 아직 들어서지는 않았으나 집에 들어선 듯한 거리감, 엄마가 늦게 오는 딸을 전화로 걱정할 때 엄마를 안심시킬 수 있는 거리. 왜 이렇게 늦냐는 전화를 받을 때 ‘아, 여기 후문이야!’ 하는 대답은 얼마나 안도하기 좋은 거리인가.

“다 왔구나. 어서 들어와.”

자연스럽게 이런 대답을 얻어낼 수 있는 곳이 후문이다.

지금 내가 말하는 후문은 정확히 말하자면 전철역이 좀 가깝고, 상가가 있는 거리로 나가기 쉬우라고 관리소에서 만들어놓은, 가정집으로 말하자면 쪽문이다. 언제부터인지 그길로 가는 빈 땅엔 도라지꽃이 가득 피고, 가을이면 사랑처럼 대추가 붉게 익는다.

 

 

전철역이 가까운 저쯤에 아내가 오고 있다. 아내랑 밤길을 걸어 후문으로 들어선다. 젊은 연인들이 서 있던 그 장미 아치 아래를 지난다. 밤이라 장미 향기가 그윽하다.

 

<교차로신문> 2022년 6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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