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애물단지들

권영상 2021. 9. 11. 12:09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애물단지들

권영상

 

 

일을 보고 오후 4시쯤 전철에 올랐다. 멀쩡하던 날씨였는데, 한강을 건너면서부터 뜬금없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빛을 보아 금방 그칠 비가 아니었다.

“비 오네. 어쩌지.”

나는 괜스레 집에다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맞고 오든지. 아니면 출구에서 우산 하나 사들고 오든지.”

아내 답장이 돌아왔다.

급기야 전철은 내가 내려야할 역에 도착했고, 나는 출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전철역으로 들어오는 이들이 빗물 떨어지는 우산을 들고 들어온다.

 

 

혹시, 하는 마음에 출구에 나와 사방을 둘러봤지만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 아내 말대로 출구 옆에 우산 파는 분이 있었고, 그분은 머뭇거리는 내 앞에 우산을 내밀었다.

하는 수 없이 우산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다. 말리려고 펴놓은 우산을 접어 우산꽂이통에 꽂을 때다. 어찌된 건지 들어가지 않는다. 접이용 우산들이 통속에 가득 들어있어 틈이 없다. 정리라도 할 겸 우산을 모두 꺼냈다. 양산에서부터 무슨 금융기관 이름이 찍힌 대형 장우산까지 무려 11개나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신발장 위 장갑이며 모자를 넣어두는 함 속에서 가방에 넣어다니기 좋은 휴대용 우산 세 개가 더 나왔다.

 

 

“식구가 셋인데 웬 우산이 이렇게나 많지?”

내 푸념에 아내가 “직장 다니며 이래저래 쓰던 거지뭐,” 한다. 그러면서 차에도 두어 개 더 있다며 “애물단지야. 애물단지!” 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이 애물단지를 내가 또 하나 사들인 셈이다. 두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불편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함께 하는 이런 애물단지가 우산 말고 또 있다.

신발장에 가득 찬 구두들이다. 직장 다닐 때는 여러 켤레를 장만해 돌아가며 잘 신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부턴가 건강! 건강! 하며 갑자기 구두가 캐주얼화와 운동화로 바뀌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신게 될 그때를 위해 구두들 또한 신발장만 차지하고 있다.

 

 

말은 대놓고 못하지만 글 쓰는 이들에게도 애물단지가 있다. 방안을 채우는 책들이다. 처음엔 한 권 두 권 들여놓는 재미가 있었지만 점점 불어나 운신의 공간이 좁아질 때 나는 책으로부터 중압감을 느꼈다. 기증도 여러 차례 했지만 이제는 도서관도 도서 기증을 기피한다. 그렇다고 버리자니 미안하고, 두자니 책에 치여 사는 게 문제다.

 

 

집안에 애물단지는 많다.

사진 앨범도 그렇다. 여행이나 집안 행사, 또는 사회활동을 하면서 남긴 사진 앨범은 그 분량만도 적지 않다. 오랜 뒤, 노후의 어느 한가한 때에 한두 번 펴볼지 모를 그 기약 없는 미래를 위해 한 공간 차지하고 있는 앨범 역시 애물단지다. 여기저기 아파트 자전거대에 10여대씩 서 있는, 아무도 건들지 않는 자전거도 버릴 수도 둘 수도 없는 애물단지다.

 

 

우리나라에서 해마다 판매되는 우산이 평균 5천만 개라는 기사에 적잖이 놀랐다.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하는데 그 물량만도 543억 원어치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애물단지를 버린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버려진 우산을 폐기하는 데만도 엄청난 인력과 비용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들을 폐기하는데서 생기는 환경오염이다. 환경오염, 하면 공장 굴뚝만 생각하지 이들 애물단지에 대한 오염은 별로 모르는 채 살아간다.

 

 

웬만한 비는 맞는다는 유럽인들의 비에 대한 인식이 부럽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나부터도 비 맞는 걸 초라하게 생각한다. 어쨌건 우리 집 우산부터 이웃과 좀 나누어야겠다.

 

 

<교차로신문>2021년 9월 16일자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까마귀의 말참견  (0) 2021.10.01
가을바다에서 만난 서퍼  (0) 2021.09.18
가지 반찬이 이젠 싫다  (0) 2021.09.04
비 내리는 날의 호박된장국  (0) 2021.08.30
마음이 무료하고 심심할 때  (0) 2021.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