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비 내리는 날의 호박된장국

권영상 2021. 8. 30. 11:49

 

비 내리는 날의 호박된장국

권영상

 

 

하루 종일 비 온다. 이런 날은 뜨끈한 국물이 땡긴다. 저녁엔 호박된장국이 좋겠다. 생각난 김에 바구니를 들고 나간다.

파밭에서 실궂한 파 두 뿌리를 뽑아 다듬어 담고, 들깨 포기에서 연한 들깻잎 대여섯 장을 딴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들깻잎 딴 손에서 화아한 들깻잎 냄새가 난다. 바구니를 들고 부추 이랑에 가 앉는다. 가위로 비를 맞고 있는 부추를 삼박삼박 자른다. 부추의 초록 향기가 속속 올라와 코 안을 자극한다.

 

 

아직 손도 대지 않았는데 엉덩이 뒤에 있는 당귀 이랑에서 당귀 냄새가 난다. 당귀는 꽃 보려고 올 봄 모종 열 뿌리를 사서 심었다. 근처에만 가도 설악산 천불동에서 마시던 당귀차 향이 난다. 두어 잎 따 담는다. 한약 같이 진한 당귀 향이 좋다.

길다란 작대기로 호박밭의 무성한 호박잎을 헤친다. 된장국 만들기에 좋은 호박 한 녀석을 찾았다. 연두색 줄무늬가 있는 털실뭉치만한 놈이다. 가위로 꼭지를 자른다. 아깝다는 생각이 톡 든다. 호박된장국엔 호박잎도 좋을 것 같아 연한 것 몇 장 따 담는다.

그러고 들어와 냄비에 물을 넣고 감자 두 알을 썰어 먼저 끓인다. 호박된장국엔 감자가 들어가야 맛이 더 깊어지는 것 같다.

 

 

호박을 심어 가꾼 지 여러 해 된다.

처음엔 아내가 심자고 했지만 길길이 벋어나가는 호박덩굴을 어찌할 거냐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근데 요 몇 년 전 겨울이었다. 고향 친구가 한번 심어보라며 단호박씨 다섯 알을 편지로 보내왔다. 정말 호박을 심게 되려고 그랬는지 그해 옆집 수원아저씨가 늙은 호박 하나를 주셨는데 볼수록 잘 생기고 탐스러웠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누런 빛깔이 점점 깊어갔다. 마치 열 번 스무 번 색을 입히는 채색화처럼 호박 속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우련한 빛이 그야말로 보석 엠버(호박) 그대로다.

 

 

근데 엠버도 엠버지만 호박이라는 말이 더 좋다. 호박! 호박! 하면 내가 호방해지는 느낌이다. 대지를 얻은 것 같이 넉넉해진다. 마음의 키가 커지고, 밴댕이 속 같던 마음에 여유가 그득 생긴다. 수박, 고지박, 물함박, 노박, 두레박, 대박, 이런 박자 돌림의 말들도 좋다. 마음이 한량없이 커지는 말들이다. 늙은 호박을 겨울내내 가까이 하면서 그해 겨울은 넉넉한 여유를 배웠다. 그 후, 봄을 맞으면서 밭에 호박을 심었다.

 

 

호박된장국이 보글보글 끓는다.

적당한 때에 넣으려고 파를 썰고 있을 때다. 누가 문밖에서 부른다. 목소리를 보니 옆집 수원아저씨다.

포도 서너 송이를 담은 비닐 봉지를 내밀며 코를 벌름거린다. 아, 된장국 끓이시네요. 한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아저씨를 불러세운다. 그리고는 썰다만 파를 썰어 넣고 한 소끔 끓인 뒤 작은 냄비에 떠담아 드린다. 호박 한 덩이를 받고 그 호박을 키워 호박된장국으로 갚는다. 서울서 내려올 때 사온 와인도 한병 드린다. 이웃간의 좋은 일이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옛 어른들의 삶을 답습해 보는 것이다.

 

 

수원 아저씨에겐 포도밭이 있다. 농사라곤 생전 지어본 적 없는 분이 퇴직을 하고는 친구가 하던 포도밭을 물려받아 재미삼아 하신단다. 포도송이야 작년에도 보았지만 조만조만하다. 그래도 제법 포도 노릇은 한다.

수원 아저씨를 보내고 혼자 앉아 비 오는 저녁답에 뜨끈한 호박된장국으로 저녁을 뜬다. 온몸으로 방금 끓여낸 된장국의 구수한 온기가 빙 돈다. 혼자 머무는 방안이 푸근해진다.

 

 

<교차로신문>2021년 9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