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현실 같은 너무나 현실 같은

권영상 2021. 8. 4. 22:37

현실 같은 너무나 현실 같은

권영상



모처럼만에 가족이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 도중에 딸아이가 친구 이림이 이야기를 꺼냈다. 길을 가다가  휴대폰을 떨어뜨려 액정이 깨어지는 바람에 휴대폰을 값싸게 새로 했다는 거다. 이림이는 아내도 나도 잘 아는 꼼꼼한 딸아이 친구다. 그러면서 날 보고 휴대폰 바꾸는 게 어떠냐고 했다.

“아빠, 6년 됐다면서요?”

며칠 전에도 아내에게 그 말을 들었다. 딸아이가 출국하기 전에 바꾸자고.

 

 

“그렇긴 하지만 아직 쓸 만하거든.”

휴대폰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우리로선 딸아이가 있을 때 구입하는 게 좋기는 하지만 망설여졌다.

딸아이가 학교로 가는 걸 보고 나는 메모해놓은 책을 사러 서점으로 갔다. 서점에 막 들어서서 책 한 권을 뽑아들 때다. 주머니에서 문자 수신음이 들렸다. 급한 내용일지 몰라 책 읽기 전에 정리할 건 정리해놓고 보자며 휴대폰을 열었다. 낯선 전화번호이긴 해도 나름 믿을만한 010이다.

 

 

-아빠, 나 폰 고장 수리 맡기고 대리폰으로 문자했어. 잠시 문자만 가능하니까 확인하면 여기로 답장 줘.

지난해 2월에 서둘러 입국하느라 구한 폰에 말썽이 생긴 모양이었다.

답장해 달라는 대로 나는 ‘수리 중이라고?’ 그렇게 물었다.

책을 뽑아들고 목차를 대충 훑어보고 있는데 다시 문자가 왔다.

-나 급하게 다니다가 폰 떨어뜨려서 액정이 나갔어. 지금 안 바쁘면 부탁 하나만 할게.

꼼꼼한 이림이도 떨어뜨려 액정을 깨뜨렸다는데 조금 덜렁대는 딸아이야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전화 버튼을 눌러 통화해보고 싶지만 마침 서점 안이고, 또 무슨 폰이 문자만 가능하다니 나는 ‘뭔데 말해봐’ 하고 적어 보냈다.

 

 

이윽고 대답이 왔다.

-폰 보험 진행해야 되는 데 나 폰은 지금 인증이 안 되서 보험 신청이 안 되네....보험금이 적지 않은 데... 아빠 명의로 보험 신청 하나만 할게

메시지 내용이 점점 어려워졌다. 폰 보험은 뭐고, 인증은 또 뭐고, 내 명의의 보험은 왜 들어야 하는 건지 약간 머리가 띵했다. ‘뭔지 모르지만 니가 알아서 해.’ 나는 모든 걸 딸아이에게 맡기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러고는 다시 책을 열었다. 책을 읽자니 자꾸 문자메시지가 마음에 걸렸다. 서점 밖으로 나와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딱 들어보니 보이스 피싱이구만. 그걸 몰랐어?”

내 말을 듣고난 아내가 대뜸 나를 깨우쳤다.

딸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을 떨어뜨린 적도 없고, 액정을 깨뜨린 적도 없단다.

정신이 약간 얼떨떨했다.

나는 왜 그걸 모르고 꼬박꼬박 답해줬을까. 아마 점심을 먹으며 휴대폰 이야기를 한 게 작용한 것 같았다. 이림이가 액정 깨뜨린 거며 또 휴대폰 바꾸자는 이야기까지. 그랬으니 나는 당연히 딸아이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은 거다. 한녘 생각해 보면 보이스 피싱이 우리 이야기를 엿듣고 문자한 게 아닐까 하는 너무나 현실같은 속임수에 마음이 섬뜩했다.

 

 

그날 밤, 그들 일당이 잡혔다는 기사가 떴다. 그들 꼬임에 많은 피해자가 생겼다. 어쩌면 그분들도 너무도 현실 같은 이야기에 그만 당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