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침을 베고 눕다
권영상
연일 폭염이다.
여름이라면 당연히 더울 일이다. 하지만 겪어볼수록 폭염의 강도가 해마다 세지는 느낌이다. 밤잠을 설치다 보니 자연 한낮이면 저절로 눈이 감긴다.
간단한 자리를 깔로 목침을 찾아 벤다. 여름엔 역시 목침이 좋다. 머리 밑이 후텁하지 않아 좋고, 두피 마사지도 되고, 그 딱딱한 소나무 질감과 나무향이 무엇보다 좋다.
몇 해 전이다,
예전에 살던 곳을 찾아 남한산성 길을 타고 오를 때다. 산 구비를 돌아가는 어느 지점에 아담한 사찰이 나왔다. 중수를 하려는지 절 마당 한켠이 목재로 가득했다. 목수 두어 분이 잠시 쟁기를 놓고 땀을 닦고 있었다.
절 마당으로 나 있는 길을 건너는데 내 눈에 잘려나간 나무 도막 하나가 들어왔다. 나무 도막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보는 내게 늙수그레한 목수 한 분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갑자기 목침 생각이 나 그러는데 써도 될는지요?”
내가 어색하게 물었다.
그러자 그분이 어디 좀 봅시다, 하며 일어섰다. 그 분은 내 손에 들린 나무도막 대신 반듯하고 흠 없는 것을 집어 들고는 몇 개나 만들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순간 욕심이 일어 두 개라고 대답했다.
당시 내가 좋아하는 시골 출신 잡지사 대표가 떠올랐다. 그분과 나는 매사에 의기투합했다. 그분도 어쩌면 목침쯤은 사랑하고도 남을 분이었다.
목수 분은 군말 없이 나무 도막을 말끔하게 대패질했다. 목침을 아시는 분 같았다. 대패질한 나무도막을 목침에 딱 맞게 두 덩어리로 잘라서는 내 앞에 내밀었다. 이 우연한 행복감에 취해 나는 염치없이 덥석 받았다. 그러고는 등산바지에 넣어온 점심값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내밀었다. 목침이나 잘 쓰라며 그분은 한사코 사양했다.
그렇게 얻어온 목침 하나를 잡지사 친구에게 보내고, 남은 건 여름이나 가을 휴일이면 빈둥빈둥 베고 즐겼다. 어릴 적 고향 아버지도 여름이면 목침을 가까이 하셨다. 점심을 마치고 나면 아버지는 마당가 오동나무 그늘에 목침을 베고 오침을 하셨다. 평생 농사일만 하시는 아버지도 여름이면 그런 한가함을 잠깐이나마 누리셨다.
지난해 여름쯤이다. 나이든 제자 녀석이 제 아내가 담갔다며 샐러리로 만든 물김치 한통을 들고 찾아왔다. 나는 그걸 고맙게 받고는 베트남 어느 화랑에서 산 그림 몇 점을 주어 보냈다.
그러고 이틀 뒤다.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 목침 커버, 여기 경비실에 놓고 갑니다.”
그런다. 저번에 왔을 때 제 아내가 거실에 놓인 목침을 보고 손수 만들었다는 거다. 나는 인사를 하고 대뜸 경비실에 맡겼다는 커버를 찾아왔다. 남색 천에 얇은 솜을 넣고 재봉틀로 누비질하였는데 물김치 솜씨도 좋았지만 재봉틀 솜씨도 역시 좋았다. 목침을 감아 붙여놓은 벨크로를 마주 대니 맞춤처럼 딱 맞다. 눈썰미가 놀라웠다.
제자는 그 후,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실리콘밸리로 떠나며 꼭 놀러오라는 인사를 했다. 다행히 그쪽의 도움으로 샐러리를 심을 수 있는 근교에 집을 구했다는 메일이 왔다.
오늘, 선풍기를 켜고 목침을 벤다. 남한산성 사찰의 중수는 잘 되었는지, 제자는 이국에서 아들 둘을 잘 키우고 있는지, 잡지사 친구는 지금도 목침을 쓰는지 궁금하다.
<교차로신문> 2021년 8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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