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창가에서 바라보는 뭉게구름
권영상
병원 창가에 서서 검진 결과를 기다린다.
꼭 14일 전이다. 병원에서 요구하고 또 나도 절실히 원한 부위의 검진을 모두 마쳤다. 그 결과를 듣기 위해 오늘 다시 병원을 찾았다. 그 동안 복용하라며 준 약을 먹었지만 달라진 건 없다. 오히려 불편하다면 더 불편하다. 그럴수록 내 몸이 긴장한다.
이 나이에 대학병원을 찾는 일 자체가 불안하다. 마지막 일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기댈 데 없는나는 성급히 병원을 찾았다. 진료실을 피해 2층 조용한 창가에 기대섰다.
사람들이 내 앞을 오고간다. 턱없이 체중이 가벼워 보이는 환자복을 입은 이, 링거병 거치대를 밀며 걷는 이. 남편인 듯한 이를 부축하는 아내, 내가 기대어 선 창가에 와 소리없이 우는 여자. 그리고 나처럼 앞으로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 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수척한 남자.....
나는 몸을 돌려 창밖을 내다본다.
병원 건너편 아파트 위로 뭉게구름이 피어오른다. 어릴 적 신비롭기만 하던 그 뭉게구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세상이 우울한 병동 분위기와는 달리 뭉게구름 빛으로 환하다.
언제라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몸이 아파온다. 쪼그려 앉으면 복부가 짓눌려 거북하다. 어딘가 보이지 않는 부위가 붓거나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 동네 병원 여러 곳을 찾았지만 나아지는 건 잠깐, 또 힘들다.
그런 상황이 어림짐작으로 6개월쯤 이어지고 있다.
복부 통증으로 새벽잠에서 깨어날 때가 여러 번이다. 비슷한 증상으로 암 투병을 하는 친구가 생각났다. 그도 나처럼 술로 젊은 시절을 살았고, 그때는 그렇게 사는 게 잘 사는 건 줄 알았다.
이쯤에서 내 인생이 끝나려는 모양이구나, 그런 생각이 문득 문득 든다.
도저히 견뎌내는 일이 불안해 아내가 있는 서울로 차를 몰았다. 운전을 못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질까봐 사정이 좀 괜찮을 때 돌아갈 생각이었다.
차를 몰아 길에 들어서자, 자연 생각이 많아졌다.
우선 내가 살아온 꽤 오랜 시간이 주마등처럼 한 순간 스쳐지나갔고, 나는 나도 모르게 체념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그만하면 후회 없이 살았다!’
너무나 의외였다. 남은 생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순간, 내 앞에 닥쳐올 운명을 별 고통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이 정말이지 나를 놀라게 했다. 인생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뒤적여 보면 온통 후회투성이인데 그런 절대의 순간, 나는 내 생에 너무나 관대했다.
그러나 예약 시간이 가까이 다가오자, 마음이 조금씩 변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나는 내가 아는 그분께 창가에 서서 기도했다.
그리고 13호 진료실로 내려갔다. 출입구 모니터에 내 이름이 떴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 담당의에게 깊숙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분이 데이터를 오판해서라도 좋게 말해주기를 바라며 한껏 허리를 숙였다. 이 순간은 분명히 내가 나 자신을 위해 담당의에게 처신할 수 있는 마지막 굴욕의 기회였다. 그런데 그게 통했던가.
“별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충분히 휴식하세요.”
나는 그 말에 일어나 또 한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병원 문을 나설 때다. 아직도 먼 하늘 뭉게구름이 뭉게뭉게 핀다. 어린 시절 문득 들판머리에서 바라보던 뭉게구름의 신비로운 변화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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