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반찬이 이젠 싫다
권영상
지난해 추석이 가까워올 무렵다.
친구랑 순댓국 약속을 했다. 여기 백암 근방에 사무실을 둔 김포가 집인 친구다. 그도 나처럼 가끔씩 집을 오르내린다. 그러니 사는 방식도 비슷하다. 그런 유형의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밥 한 끼 해결할 수 있는 점심 약속이다. 그 밥이 꼭 비싸고 품위 있을 필요는 없다. 한 끼면 되니까.
재미나게 순댓국을 먹고 복개도로를 따라 걷고 있을 때다.
“이 봐요! 가지 좀 드릴까?”
복개로 아래 우묵한 밭에서 일흔은 됨직한 분이 우리를 불렀다. 왜 그랬을까. 우리 행색에서 밥해먹는 냄새라도 맡은 걸까. 그분은 우리의 대답은 듣는 둥 마는 둥 수레에 따놓은 가지를 우리에게 던져 올렸다. 우리는 밑을 내려다보며 던져 올리는 가지를 받았다. 받는 것도 있고 놓치는 것도 있고. 어떻든 한두 개가 아니었다. 마치 수레 속의 가지를 우리에게 처분할 기세였다. 우리는 어떻든지 가지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만은 막기 위해 헛손질을 해가며 가지를 받았다.
그런 가지는 일생 처음이었다. 가늘고 길다란 보라가지였다. 대충 스무 개는 되었다.
“가지 값을 드릴까요?”
좀 황당하긴 하지만 우리는 그분을 내려다보며 지갑을 꺼냈다.
“단지 드리고 싶었소. 추석에 잘 해 자시구려.”
그분은 돌아섰고, 친구와 나는 반반씩 나누어 제각각 집으로 돌아왔다. 논길을 지나면 쌀이 나오고 밭길을 지나면 감자가 나온다더니 가지밭 길을 지나가다 뜬금없이 가지를 얻었다.
집에 오는 대로 가지를 쪼개어 예전 어머니가 하시듯 가을볕에 말렸다.
그 씨앗을 받아 올봄 토마토 이랑 끝에 네 포기를 심었다.
그분이 주고 간 가지는 처음부터 달랐다. 어른 키만큼은 클 태세였다. 보라꽃 피는 자리마다 가지가 맺혔는데 크기 시작하자 그분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네 포기에서 달리는 가지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웃과 나누고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가지는 부지런히 열었다.
끝내 같은 서울이지만 멀리 떨어져 사는 막내누나에게까지 가지를 들고 갔다. 내가 내민 가지 상자를 반갑게 받아든 누나가, 동생이 들고 온 가지를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며 눈물을 보였다.
하평 논은 집에서 멀어 벼를 베는 아버지 점심은 누나가 날랐다. 어머니가 오래도록 병원에 입원 중이셨을 때니 누나가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그 먼데까지 가져갔다. 혼자 힘들여 일하시던 아버지는 누나가 내놓은 가지 반찬을 보고는 “가지 반찬이 이젠 싫다.” 그러시더라는 거다. 아버지를 돌보아드릴 엄마가 없던 시절 아버지는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을까. 가정이 힘들어 별 반찬이 없던 때이기는 해도 그래도 아버지는 그러는 내가 미우셨겠지? 누나는 그 옛날의 일을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나이 어린 막내이긴 해도 나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기나 했을까.
지금도 가끔 가지 반찬을 해 먹을 때면 막내누나가 하던 아버지의 서러운 말씀이 떠오른다.
‘가지 반찬이 이젠 싫다.’
추석이 벌써 코앞에 다가왔다.
가지 반찬으로 어머니 없던 시절을 외로이 넘기시던 아버지. 먼 곳에 가 계신 그 아버지를 추석엔 꼭 찾아뵈어야겠다.
<교차로신문>2021년 9월 9일자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바다에서 만난 서퍼 (0) | 2021.09.18 |
---|---|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애물단지들 (0) | 2021.09.11 |
비 내리는 날의 호박된장국 (0) | 2021.08.30 |
마음이 무료하고 심심할 때 (0) | 2021.08.22 |
이사 가시는 7층 할머니 (0) | 2021.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