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의 말 참견
권영상
아침부터 길 건너 장씨 아저씨네 고추밭이 떠들썩하다. 건너다보니 떠들썩한 목소리가 고추밭에 들어선 두 대의 파라솔 밑에서 울려나온다. 장씨 아저씨 부부다. 고추에 가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이슬이 말라가는 고추밭을 흔든다. 파라솔 그늘에 숨어 익은 고추를 따는 모양이다.
장씨 아저씨 춘부장께선 지난해에 돌아가셨다. 그래선지 통 보이지 않던 그 댁 며느리인 장씨 아저씨 아내가 모처럼 나왔다. 젊은 분의 목소리가 무잎처럼 푸르고 싱그럽다.
나도 무밭의 벌레를 잡으려고 방에서 나와 무 이랑에 들어섰다.
“저번에 진주엄마 말야. 고지서 봐 달래서 갔더니 글쎄 진주엄마 안경이 장장 여덟 개야! 여보, 놀랍잖아? 뭔 멋을 낸다고 여편네가 안경이 여덟 개야?”
숨죽이며 벌레를 찾는 내 귀에 장씨 아저씨 아내분 목소리가 성큼성큼 울려왔다.
억양이 크다. 말이 시원시원하고 힘이 있다. 여자 목소리치고 우렁우렁하지만 정감이 간다. 누구라도 한번 들으면 속이 확 뚫릴 목소리다.
그 말끝에 장씨 아저씨가 당연히 ‘무슨 안경이 여덟 개 씩이나?’ 하고 맞받았다.
아니, 나는 그 대꾸가 고추밭의 고추들이 엿듣고 되묻거니 했다. 아니 묵묵히 서 있는 고추밭 파라솔들이 대꾸한 줄 알았다. 왜냐면 나도 그 걸 되물을 뻔 했으니까.
그만큼 그분은 말을 시원시원하게 했다.
“그 봐. 당신도 이상하지? 나도 이상했어. 그래 내가 뭔 안경이 이리 많냐 했더니 그게 글쎄 모두 돋보기라네. 글씨가 점점 안 보여 시내에 나갈 때마다 도수 높은 걸 사들였다는 거야. 여편네가 돈도 많지. 그거 살 거면 안과에 가 눈을 고쳐야 하잖아?”
그분이 그쯤에서 말을 끊고 숨을 돌리려 할 때다.
“맞구 말구! 암, 그래. 그래야 하구말구!”
이번에는 건너편 산자락 나무숲의 까마귀들이 맞장구를 쳤다. 장씨 아저씨 아내분의 말을 귀담아 듣던 까마귀들이 참지 못하고 말 사품에 끼어든 거다. 까옷! 까옷! 까옷! 울어대는 울음소리가 아무리 아니라 해도 내 귀엔 그렇게 들렸다.
들을수록 그분의 말소리가 잡채 반찬처럼 차지고 맛있었다. 내가 그런데 월화수목금토일요일을 안다는 까마귄들 안 그럴까. 그건 분명 까마귀들의 그런 대꾸였다.
“그래서 내가 그랬지. 이 정신 나간 것아! 눈을 고치고 고지서 읽을 생각을 해야지!”
이야기가 그쯤 흘러가자 숲속 까마귀들이 ‘옳거니, 옳거니!’ 이야깃속에 너도나도 뛰어들었다. 까마귀들 말참견에 성이 난 건 제가 할 대꾸를 빼앗긴 장씨 아저씨였다.
“야, 이누머 새끄들! 씨끄럽게 자꾸 울래?”
키 작은 장씨 아저씨가 불쑥 일어나 손을 들고 까마귀들을 을러메었다.
“너는 빠져! 빠져! 빠지라구! 까옷! 까옷! 까옷!”
까마귀들이 야유하듯 울며 날아올랐다.
사건이 이제는 까마귀와 장씨 아저씨의 대결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서, 진주 엄마는 안과에 갔는지, 읽어달라는 고지서는 읽어주었는지 더는 알 수 없이 장씨 아저씨 아내분의 말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장씨 아저씨 춘부장께서 밭에 나오실 때는 장씨 아저씨는 고추밭이 들썩거리도록 주로 유행가를 메들리로 틀어댔다. 그러던 것이 올해는 완전 생방이다.
<교차로신문>2021년 9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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