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같은 가을 들녘
권영상
방에 틀어박혀 며칠간 일에 매달려 있을 때다. 가끔 산 너머 먼 들에서 기계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이즈음 들판에서 나는 기계소리라면 뻔하다. 벼 베는 콤바인 소리다. 차를 몰아 안성으로 내려올 때 길가에 펼쳐진 노란 가을 논 들녘을 보며 아, 가을이 깊어가는구나! 했다. 추수한 논들도 더러 있지만 그대로 있는 논들도 아직은 많았다.
나는 하던 일을 놓고 벌떡 일어섰다.
등산 스틱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들녘에 나가 본지 오래다.
스틱을 잡고 보니 내가 들녘에 나가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개들 때문이다. 마을을 나서려면 골목과 몇 채의 집들을 지나야 하는데 어떻게 된 게 집집마다 개가 있다. 어린 개들은 어린 개들대로 발소리만 들려도 앙칼지게 짖는다. 쇠철망 속에 갇혀 사는 크고 험악한 개들 역시 인기척에 예민하다. 사람만 보면 쇠철망을 뚫고 뛰쳐나올 듯 몸부림치며 짖는다. 그때에 손에 스틱이라도 하나 없으면 두렵다.
그때부터다.
개들이 성가셔서 들녘에 나가지 않았다.
스틱에 힘을 주며 마을 골목길을 돌아 벽장골로 나가는 언덕에 올라섰다. 눈부시도록 노랗게 벼가 익은 지난날의 들녘을 생각했는데 아니다. 한눈에 실망이다. 논벌이 검정 비닐 차양막으로 뒤덮여 있다. 말로만 듣던 그 풍경이다. 벼가 한창 익고 있어야할 논벌이 모두 인삼밭으로 변해버렸다.
요 이태 전만 해도 이들 논벌의 맞은편 산언덕은 온통 도라지 밭이었다. 도라지꽃이 필 때면 그 하얗고 파란 꽃물결을 보러 시간을 내어 산언덕을 오르내렸다. 근데 들녘에 안 나온 요 2년 사이, 도라지꽃 피던 산언덕은 트럭에 실려 논으로 내려와 인삼밭이 되었다. 한두 자리가 아니다. 벽장골 일대가 인삼밭으로 변했다.
전만에도 여기 벽장골에 나오면 농병아리들이 새끼를 거닐고 논두렁길을 넘나들었다. 벼가 익을 때면 여기저기 물꼬에서 물 빠지는 소리가 쪼롱쪼롱 들렸고, 누렇게 익어가는 벼는 내 논의 벼가 아니어도 내 배를 부르게 했다.
근데 그 좋던 논벌이 사라졌다.
아쉬운 걸음으로 산모롱이를 돌아설 때다. 내가 바라던 황금들판이 기적처럼 활짝 드러났다. 그 들판 한가운데에서 콤바인이 벼를 베고 있다. 나는 그곳이 마치 내 오래된 고향이나 되는 것처럼, 콤바인에 앉은 이가 오래된 고향 벗이나 되는 것처럼 서둘러 걸었다.
어디쯤 멈추어 서서 벼 베는 모습을 물끄러미 건너다본다. 콤바인은 자연스럽다. 자연스레 벼를 베고, 탈곡하고, 탈곡한 벼를 자루에 담고, 자루가 차면 차곡차곡 뉘이고, 볏짚은 논벌에 떨어져 가지런히 깔리고……. 바라볼수록 도무지 싫지 않다.
“하루 만 오천 평은 일해요.”
콤바인에서 내린 남자가 땀을 닦으며 내게 음료수 한 병을 권한다.
이젠 농촌도 변했다. 전 같으면 생각도 못 할 일이다. 생면부지의 내게 음료수를 권할 만큼 농촌이 좀 여유로워진 것 같다.
벼이삭을 잡아본다. 굵다. 노란 볏잎 빛깔 또한 가을볕에 눈이 어리다. 살찐 메뚜기가 사라지고, 삐뚜름히 모자를 쓴 허수아비마저 사라졌지만 벼 익는 노란 들판만은 고향답다.
“여어! 이거 모처럼 고향 걸음했네!”
어디선가 고향을 지키는 초등학교 동창이 나타나 악수라도 청할 것 같은 가을 논벌이다.
<교차로 신문> 2021년 10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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