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아침 눈 위에 쓰여진 글씨

권영상 2016. 12. 30. 13:27

아침 눈 위에 쓰여진 글씨

권영상




새벽에 눈을 떴습니다. 일어나 거실에 놓여있는 램프를 안방 머리맡에 옮겼지요. 그 램프불로 몇 장의 책을 한창 읽어나갈 때입니다. 창밖에서 눈치는 소리가 납니다. 눈가래로 아파트 마당을 미는 소리는 너무도 오랫만에 들어보는 내 마음의 동화 같습니다.

나는 책읽기를 멈추고 눈가래질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요. 그 소리가 또 한참만에 멈춥니다. 다시 책을 읽으려고 책에 눈을 두어보지만 마음은 이미 창문 밖 눈가래질 소리를 기다리고 있네요. 이윽고 눈가래질 소리가 다시 4층 내 방으로 울려옵니다. 출근을 위해 관리소분들이 눈을 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책 읽을 마음이 그만 사라졌습니다. 7시가 가까운 시간입니다. 조용히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그닥 많지는 않지만 제법 하얗게 눈이 내렸습니다. 나는 눈덮힌 산을 보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지요.

해는 아직 산등성이 너머에 있지만 세상은 이미 해가 뜬 것만큼이나 환합니다. 발자국 없는 눈길을 걷는 기분이 아침 싸늘한 바람에 비할까요. 냉한 바람을 맞으며 산속 오솔길을 걷는 아침이 좋습니다. 잡목숲길을 지나 천천히 잣나무숲에 들 때이지요. 거기 펀한 입새에 나보다 앞서간 누군가가 눈 위에 글씨를 써놓았습니다.



‘送舊迎新’(송구영신)

한자 글씨에 익숙한 잘 연마된 필체입니다. 진정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고 싶은 마음이 그 글씨에 배어있는 듯 반듯합다. 지금 내 마음이 그렇습니다. 나라 정치가 어수선한 것도 있지만 가까운 친인척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병고와 그분들의 어두운 생사의 그림자에 너무 오래 짓눌려 왔습니다. 그 일이 묵은해가 간다고 금방 끝나고 말 일이 아닌 줄은 알지만 얼른 이 해가 갔으면, 그런 바램이 있었습니다.



이 글씨를 쓴 분도, 그분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한자를 능숙히 쓰는 세대이고 보면 그도 이미 한 시절을 좋이 산 분일 듯 합니다. 그분의 나이가 그러하다면 그분 역시 나와 같은 아픔에 짓눌려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쪽에 그분의 또 다른 글귀가 있습니다. ‘好時節’(호시절),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말할 테지요, 영화 ‘화양연화’를 닮은, ‘호우시절’을 닮은. 이 눈 위에 이렇게 써놓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던 그분의 호시절은 언제쯤이었을까요.

‘지금 이 시간이 아닐까.’

나는 이미 저쪽 산등성이 위로 올라온 해를 바라보며 그렇게 불쑥 말했지요. 잠시 후, 햇살이 붉어지면 이 눈도, 이 글씨도 금세 사라져버리고 말겠지요. 그렇다면 이 글씨 好時節의 행복한 시절이란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아닐까요.



걸음을 떼어 산길을 오르면서 나는 내 인생의 호시절을 생각했지요. 마치 한번 읽은 책을 꺼내들고 밑줄 쳐둔 곳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듯 이리저리 내 인생의 갈피를 뒤적였지요. 그러느라 나는 젊은 날에는 갔으나 그 후론 가지않던 먼 곳까지 가서는 돌아섰습니다.

오늘 아침은 누군가 눈 위에 던져놓은 ‘호시절’이라는 화두를 안고 산속을 헤매인 셈입니다. 산을 다 내려와 그 잣나무 오솔길 입새에 다시 이르렀습니다. 올라올 때에 보았던 그 好時節을 다시 찾았지만 이미 거기엔 호시절도 눈도 다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남은 거라곤 빛바랜 잣잎이거나 가랑잎들 뿐입니다.



호시절은 지나온 인생의 어느 책갈피 속에 있는 과거가 아닌 듯 합니다. 그것이 지금 서 있는 이 순간임을 눈과 함께 사라진 허전한 뒷자리가 보여주고 있네요. 돌아오며 나는 내 앞에 놓인 이 싸늘한 아침시간을 불평없이 받아들입니다. 나의 호시절이 이 시간 속에 있음을 방금 보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