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한적한 시골 왕복 2차선 길

권영상 2016. 12. 21. 11:43

한적한 시골 왕복 2차선 길

권영상




차가 백암에서 안성으로 가는 삼거리에 들어설 때입니다. 커다란 트럭 한 대가 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혹시나 내가 가려는 삼백로에 들어서면 어쩌지, 했습니다. 잠깐이지만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는데 그게 맞아떨어졌지요. 좌회전 깜빡이를 넣던 트럭은 역시 내 직감대로 왕복 2차선인 삼백로에 들어섰습니다.



그 트럭 뒤에 밴이, 그 뒤에 내가 따랐지요. 속도를 내겠지 했는데 트럭은 맥 풀린 사람의 걸음처럼 느렸지요. 건설 공사장 공사 자재를 잔뜩 실었습니다. 뒤 따르던 밴이 몇 번이나 추월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제 자리로 다시 돌아옵니다. 반대 차선에서 심심찮게 차들이 달려오고 있기 때문이지요.



나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뭐 급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왜 있잖아요. 핸들만 잡으면 속도를 내려는 본능 말입니다. 추월 기회를 보아 황색선을 넘나들지만 그때마다 위험요소가 돌출합니다. 그러는 우리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트럭은 여전히 늑장을 부립니다. 계기판을 봤지요. 간신히 40킬로미터 속도로 느릿느릿 갑니다. 우리의 인내를 시험해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건지 답답합니다. 내 뒤를 따르는 차들도 자꾸 늘어납니다. 



간단히 가면 가는 길인데 부지하세월입니다. 그때입니다. 길가의 봄날 같은 겨울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볏짚을 둥글게 말아 흰 비닐로 감싼 사일리지가 군데군데 서 있는 모습이 이국적입니다. 물을 잔뜩 가두어 놓은 논도 보이고, 길갓집에서 나온 닭들이 마른 밭을 파뒹기는 모습도 보입니다.



나는 FM 라디오를 켰습니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대부’의 주제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 중이네요. 가슴을 저리게 하는 음악의 애잔함이 흑백 영화의 과거 속으로 나를 이끌고 갑니다. 아련한 추억 같은 대부를 들으며 짐 실은 트럭 뒤를 느릿느릿 따릅니다. 어찌 보면 이게 영화 속의 한 신 같아 나는 나의 연기에 충실하려 애씁니다. 나의 연기란 느린 트럭을 흥미롭게 따라가는 운전자입니다. 차창 문을 열고 폭폭 쏟아지는 겨울 볕을 향해 휘파람을 붑니다. 달콤한 멜로디를 흥얼거립니다. 그게 나에게 맡겨진 연기입니다. ‘느릴수록 나는 행복해지지!’ 그렇게 중얼거려 봅니다.

가끔 남의 일에 끼어들 때면 나는 어슬렁거리는 삶과 느린 삶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해 왔지요. 마치 그런 삶을 진짜 사랑하는 것처럼. 그러나 정작 내가 닥쳤을 때 나는 그걸 못 참고 위험한 추월의 기회를 넘보았던 거지요.



‘대부’가 끝났습니다.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챙겨드리지 못해 미안하다는 누군가의 신청곡이 이 느린 길 위로 또 흘러나옵니다. 머라이어 캐리의 ‘섬데이’. 나는 머라이어 캐리를 좋아하지요. 딸아이가 어렸을 적 좋아하던 그녀였기에 나도 따라서 그녀를 좋아했지요. 그녀의 노래에 맞추어 핸들에 손 박자를 넣습니다. 느리게 가는 트럭 덕분에 오래된 과거를 추억하며 한적한 시골의 왕복2차선 길을 가고 있습니다.



10분이면 되는 그 길을 30분을 넘겨 트럭을 보내고 나는 나의 길을 달려왔지요. 달려왔다고 해봐야 느리게 온 그 길보다 아무 더 나을 것도 없는 길이었네요. 느린 길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오늘은 비록 잠시였어도 행복한 시간을 맛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