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5층 할아버지

권영상 2016. 7. 23. 15:37

5층 할아버지

권영상




가끔 뵙는 할아버지가 있다. 크림색 양복에 중절모를 쓰고 단장을 잡고 조용히 걸으시는 분. 아파트 우리 집 위층인 5층에 사시는 분이다. 일흔 후반은 되셨을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드리면 네에, 그렇게만 대답을 하시는 분. 내가 그분에 대해 아는 건 이게 전부다.



그분의 뒤엔 조용히 따르는 할머니가 계신다. 할머니는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으실 때도 있고, 때로는 롱 스커트에 블라우스 차림을 하시기도 한다.

“에휴, 무릎이 아파서 여기 쉬었다 가려고 앉았어요. 늙은이를 욕하지 말아요.”

가끔 마당에서 올라오는 계단에 할머니가 앉아계시곤 했다. 무릎을 만지며 늙은 나이를 한탄하신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외국에 나가 사는 아들과 손자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다. 

 “자식이라고 남의 나라에 가 사니, 키운 보람이 없어요.” 

할머니 머릿결은 염색을 하시는 할아버지와 달리 하얗다. 그런 고충 때문인지 얼굴엔 주름이 많다. 계단에 앉아서는 늘 무릎과 발목 근처를 주무르셨다.



나는 할머니도 이미 알고 계실 홍화씨 이야기를 또 꺼낸다. 말을 받아주는 게 젊은 사람 도리가 아닐까 해서다. 그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할머니 연세가 일흔일곱이라는 것도 알았고, 할아버지가 일흔아홉이라는 것도 알았다. 아파트 계단이 아니면 길에서도 가끔 할머니를 뵈었다. 물건을 사들고 오시면 들어드리기도 하고, 천천히 말동무를 해드리며 걸음을 맞추어 걷기도 했다.



그런 때에 우연히 할아버지를 만나면 할아버지 외모는 매양 똑 같았다. 크림색 양복에 중절모를 쓰시고 단장을 짚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드리면 “네에.” 그 한 마디 뿐이시다. 고향의 아버지도 그러셨다. 읍내까지 한 시간을 함께 걸어도 별로 말이 없으셨다. 그렇기는 해도 함께 걷는 순간은 싫지 않았다. 오히려 말없이 걷는 그런 걸음이 이제 내 나이에 맞는 듯도 했다. 



 “먼저 가세요. 이 시간이면 배고프실 텐데.”

할머니는 고향의 어머니처럼 배고파 할까봐 나를 걱정하셨다. 아니 걸음걸이를 맞추는 내가 불편해 할까봐 그러셨다. 그렇게 그분들을 가끔 가끔 만났었다.

그런데 오늘 오후다. 여태 못 뵌 할머니를 뜰마당 계단에서 만났다. 할머니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할아버지도 잘 계시지요?’ 하고 여쭈었다.

“한 달 전에 돌아가셨다오. 병원에서.”

그 말에 나는 아! 하고 놀랐다.


할머니를 위로해 드리고 계단을 걸어올랐다. 마음이 텅 빈 듯 하다. 한 층 위의 분이 세상을 뜨셨는데도 그 소식을 한 달이나 지난 뒤에야 알게 되다니! 사람이 가고 오는 일이 마치 산들바람이 소리없이 가고 오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예전 같다면 집앞 대문에 조등을 내걸어 사람이 가는 일을 지상에도 하늘에도 알렸다. 그런데 소리 소문도 없이 슬며시 가버리셨다. 세상 중에 놓여있는 내가 갑자기 외로워졌다.  혼자 뜰마당을 걸어가시던 위층 할머니가 그러고 보니 오늘은 무릎 아프단 말씀을 안 하셨다. 외로워 보일까봐 참으신 건 아닐까.


(교차로신문 2014년 6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