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여린 꽃잎들의 가혹한 희생

권영상 2016. 1. 11. 18:16

여린 꽃잎들의 가혹한 희생 

권영상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비가 온다. 4월내내 서울엔 비가 오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우두커니 비를 내다본다. 무성할 대로 무성해진 느티나무며 벚나무들이 이 비에 삼단같은 초록빛을 늘어뜨린다. 그들을 바라보던 내 눈이 놀이터 쪽 모과나무 아래에 가 멈추었다.

엊그제까지 연분홍으로 피던 모과꽃이 밤새 내린 비에 다 떨어졌다. 하얗다. 나는 나무의 수형대로 둥글게 떨어진 모과꽃잎들을 망연히 보았다. 4월의 나무들이 즐기고 있는 이 비의 축복도 그들에겐 축복이 아니라 눈물이었다.

 

 

꽃은 곱다.

어디에서 피건 꽃은 다 곱다. 나뭇가지에 피어있을 때도 곱지만 땅 위에 떨어져 누웠을 때도 곱다. 꽃은 그렇게 다 예쁘다. 세상에 예쁘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열 손가락을 깨물어 열 손가락이 다 아프듯 이 세상에 피어난 꽃은 떨어져도 하물며 다 예쁘다.

 

 

떨어진 꽃이 아름다운 건 열매 맺기 위해 그 찬란한 시절을 스스로 버렸기 때문이라 한다. 가장 아름다운 때를 위하여 떨어질 줄 아는 꽃의 이면엔 열매를 맺으려는 본능이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나무에 핀 꽃이라고 다 열매를 맺는 건 아니다. 그 중에는 결실의 꿈을 가져보지도 못한 채 떨어지는 슬픈 꽃도 많다. 낙화가 서럽고도 비극적인 건, 그런 꽃들의 아픈 희생이 있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밤하늘이 아름다운게 이름있는 별들 때문이 아니라 보일 듯 말듯 이름없이 떠 있는 외로운 별들 때문인 것처럼.

 

 

나는 우산을 쓰고 낙화를 보러 마당으로 내려갔다. 4월 비에 아파트 마당은 벌써 푸른 숲의 향연을 구가하고 있다. 나무라는 나무들은 일찍 찾아온 봄 잔치에 꽃을 피우고 떨어뜨린 지 이미 오래 됐다. 이제는 결실을 위해 잎을 키우고 가지를 뻗기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 모과나무는 남들 다 달려나간 뒷자리에 우두커니 홀로 서서 꽃을 떨어뜨리고 있다. 남들은 5월을 향해 꿈을 키우고, 남들은 그 너머의 미래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는데 4월 비의 무게를 못 이기고 차가운 땅바닥에 젖은 꽃을 하얗게 떨어뜨려 놓았다.

 

 

나는 그 많은 꽃잎 중에서 한 잎을 집어 들었다. 눈물 같은 비에 젖어 꽃잎이 차갑다. 이 꽃잎도 지금은 비에 젖었지만 처음 꽃망울을 터트릴 때엔 꿈에 부풀었을 테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의 꽃으로 피어나기 위해 달떴을 것이다. 높고 고귀한 이념으로 세상을 향기롭게 만들어보겠다는 기대로 부풀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 꿈을 펼치기 위해 길고 어두운 밤을 인내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꽃잎들은 그 꿈을 접고 땅에 떨어졌다. 그 여리디 여린 몸으로 모순과 부조리와 욕망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감싸안기 위해 누구도 엄두내지 못하는 지상 위에 쿵, 떨어졌다. 그때 이 모순투성이의 세상은 배의 갑판처럼 기우뚱했고, 바다는 출렁, 하며 크게 요동쳤다. 하필이면 그 순정한 꽃잎들이 어른들을 대신해 가혹한 희생을 치루었다. ‘엄마, 나 어떡해.’ 하는 비명을 이 지상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아, 꽃은 졌다. 비에 젖어 울고있는 꽃잎에 경건히 입을 맞춘다. 그리고 ‘안녕히!’ 속으로 울며 작별을 한다.

 

 

<교차로신문> 2014년 5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