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나는 내게 몇 점이나 줄 수 있나

권영상 2015. 9. 7. 21:29

나는 내게 몇 점이나 줄 수 있나

권영상

 

 

 

 

영화 <여인의 향기>로 잘 알려진, 다소 싸늘한 캐릭터의 배우 제임스 레브혼이 생각난다. 며칠 전 그의 애석한 죽음과 함께 그가 임종 직전에 썼다는 부고가 일간지에 소개됐다.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유서란 가족에 한정된 글이다. 그러나 부고란 다중의 사람들에게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글이다. 그런 면에서 부고는 유서와 달리 진실해야 된다.

 

 

 

레브혼은 평생을 바쳐 일한 배우라는 직업과 가족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표하며 그 부고의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그는 모든 면에서 운 좋은 사람이었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부고는 솔직하다. 비록 조연이긴 해도 100여 편의 작품에 명품같은 연기를 한 배우가 레브혼이다. 그런 그가 제 3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인생을 단지 ‘운 좋은 사람’으로 평가하는 태도는 겸손하다 못해 정직하다.

 

 

많은 사람들이 부고는 몰라도 묘비명을 써놓고 사라졌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이렇게 썼다. “후세 사람들이여, 나의 휴식을 방해하지 마시오”. 그런가 하면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내 우물쭈물하다 이럴 줄 알았다.”고 썼다. 프랑스 혁명가이자 정치가인 조르주 자크 당통은 “조르주 자크 당통, 이 사람에겐 많은 죄악이 있었지만 최대의 죄악인 위선은 없었다.”라고 썼다.

누구든 한 생을 살고 이승을 떠날 때면 자신의 인생을 평가하고 싶을 것이다.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건 숨소리조차 조용히 낮추며 산 평범한 사람이건 생애를 정리한다는 차원에서도 그런 유혹을 받을 것이다. 마치 학교 공부를 다 마치고 난 뒤 자신이 성취한 점수를 알고 싶어하는 아이들처럼.

 

 

그때에 평가하고 싶은 점수는 많을수록 좋겠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손으로 쓴 부고나 묘비명도 때에 따라 진실하지 못할 우려가 있다. 어느 시인의 “묘비명”이란 시를 보자.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꿋꿋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자신의 생애를 과시하고 싶어한 어느 권력자의 묘비명을 비아냥댄 시이다.

 

 

이에 반해 ‘모든 면에서 운 좋은 사람이었다’고 낮추어 평가한 레브혼의 부고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나는 한 번도 나의 유서나 묘비명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조르주 자크가 자신을 가리켜 최대의 죄악인 위선은 없었다고 했지만 나는 위선자다. 세류에 휩쓸리는 나약한 인물이며 여러 개의 얼굴로 잘난 아들인 척, 남편인 척, 아버지인 척 나를 꾸미며 살았다. 가족을 향한 변함없는 애정에 소홀했고, 남을 위해 헌신한 적이 별로 없다. 내게 점수를 주어보라면 몇 점이나 줄 수 있을까? 오랫동안 직장에 매달려 밥벌이는 했으니 60점쯤 준다면 너무 후할까. 깎는다면 깎을 수는 있겠으나 점수를 더 얹어주기는 무리일 것 같다. 내가 나를 너무도 잘 안다.

 

 

   <교차로신문 2014년 4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