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접받지 못하는 사회
권영상
내게는 50대 후반에 퇴직한 친구가 있다. 그는 나처럼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40년 가까이 직장에 매여 살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흔한 등산 한번 못 해보고, 여행다운 여행 한번 못 해봤다고 했다. 괴로운 건 퇴직은 했으나 아직 취직을 못한 아들이 있다는 것이다.
“집에서도 내가 있을 곳이 없어.”
커피숍에서 만난 그가 그랬다. 집에 있으려면 빈둥대는 자식 보기가 괴롭고, 눈총만 주는 아내도 싫어 일없이 나돈단다. 일자리도 구하기 어려워 할 일없이 길을 걷는 게 취미가 됐단다. 퇴직 했으면 좀 편히 쉴 자리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며 그가 언성을 높였다. 다른 친구들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집에 있으면 ‘마누라 눈치 보여’ 매일 이 산 저 산 전전한다는 게 퇴직 후의 우리나라 남자들이다. 오랫동안 일 했으면 거기에 합당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문화가 무엇보다 아쉽다.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다니던 친척 동생도 직장을 옮겼다며 새로 찍은 명함을 내놓았다. 젊은 후배들에게 치였단다. 중학교 제자 중에는 공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해 취업한 이들이 있다. 그들 중 한 제자한테서 언젠가 전화를 받았다.
“경력사원으로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것 같아요.”
그가 통화 중에 그런 말을 했다. 그는 여러 개의 기술 자격증도 갖추었고, 입사한 후 3년 동안 열심히 일해 나름대로 보수도 괜찮게 받았단다. 그래서 직장에 대한 긍지도 갖고 일했는데, 어느 날 신입한 대졸자 월급이 자신과 같다는 사실에 절망했단다. 갑자기 일할 맛이 안 나고, 자신이 회사에 필요한 사람인가 하는 회의감마저 들어 지금 직장을 그만 둘까 고민 중이라는 거다. 작은 회사든 큰 회사든 사람을 대접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다.
교편을 잡고 있는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언론은 그들이 철밥통이라며 걸핏하면 뭇매를 든다. 성추행 교사니, 점수조작 교사니, 폭행교사니, 촌지교사니 하며 일부의 문제를 들어 전체를 매도하며 그나마 교사를 존경하던 풍토마저 일시에 망가뜨려 놓았다. 인사청문회 또한 그렇다. 그 분야에서 나름대로 성공한 인물을 불러다 놓고 온갖 먼지를 털어대며 형편없는 인물을 만든다. 청문회는 마치 ‘괜찮은 인물’을 털어 대놓고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전락시키는 사냥터와 같다. 이런 경쟁주의 문화는 우리 스스로를 존중받지 못하고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이 때에 나타난 상업주의가 있다. 의료병원과 백화점이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이런 허점을 일찍이 간파한 듯하다. 병원은, ‘의료보험증, 여기 계시겠습니다.’, ‘어금니가 아프십니다.’, ‘휴대폰이 울리십니다.’ 등의 방식으로 고객과 그들의 종속물까지 존대한다.
백화점도 지나치게 예의를 표하기는 마찬가지다. 백화점 종사원들의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인사는 오히려 민망할 정도다. 왜 이들은 필요 이상의 존대에 매달릴까?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우리 사는 세상에서 제대로 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며 산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접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재빨리 상업주의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교차로신문>2014년 2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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