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기다리는 이유
권영상
가끔 오르는 산비탈 오솔길 옆에 어린 잣나무 하나가 있다. 잣 씨앗에서 갓 움터나온, 사람으로 말하자면 갓난아기와 같은 묘목이다. 사람의 손에 의해 베어진 죽은 오리나무 그루터기 밑이 그의 터전이다.
지난해 가을, 산을 오르다가 문득 그 어린 잣나무를 만났다. 그때 나는 무릎을 꿇고 그 푸른 빛 앞에 앉았다. 아직 어리지만 소중한 청록빛. 조락하는 계절이라 잣잎 빛깔이 홀로 이 산을 빛내는 듯 환했다.
“겨울을 잘 이겨내고 내년 봄에 보자.”
낙엽들을 그러모아 다독다독 덮어주고 일어섰다.
오리나무와 팥배나무로 뒤덮인 이 산에 잣나무라니! 암만 생각해도 모를 일이지만 또 생각해 보면 크게 모를 일도 아니다. 산길로 들어오는, 여기서 먼 입구에 제법 큰 잣나무 숲이 있다. 그 숲에 잣송이 잣을 먹으러 오는 청설모가 여기에다 잣을 숨겨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만 찾아먹는 일을 깜박한 덕분에 태어난 게 이 잣나무가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이 어린 잣나무가 여기 태어난 건 순전히 그의 뜻이 아니다. 먼 누군가의 우연한 망각에서 시작됐다. 그때 청설모의 다행스런 망각이 없었다면 태어날 수 없는 것이 이 잣나무다. 그런데 하필이면 사람의 손에 잘려나간 오리나무 곁이 그의 자리일까. 내가 어린 잣나무에게 내년 봄에 다시 보자고 인사를 했던 건 그런 태생 때문이었다.
이 넓은 산을 두고 어린 잣나무는 그런 위험한 터전에서 태어났다. 아직은 어려서 모르겠지만 그도 나이를 먹어 제가 태어난 자리를 안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집에 데려와 화분에 심어 내가 가꿀까 그 생각도 했다. 그러나 사람 가까이에 산다는 건 더 위험한 일이다. 다만 산비탈 길이 바뀌거나 없어지거나 하기를 바랄 뿐.
그날 이후로 산에 가는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그 어린 잣나무를 보러가는 일이다. 갈 적마다 보면 다독다독 덮어준 낙엽들이 바람에 날려 쌀몸뚱이로 옹크리고 있다. 쌀몸뚱이로 냉혹한 세상과 대적하기엔 잣나무는 너무 어리다.
이 어린 잣나무가 사람의 간섭을 받고도 끄떡없이 견뎌내려면 7,8년, 아니 10여년은 자라야 한다. 그때를 생각해 본다. 산길 옆에 늠름하게 자란 잣나무 한 그루를. 그는 어쩌면 내 걱정과는 달리 여기 이 비탈에 서서 힘들게 산을 오르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거나 그들의 그늘이 되어주는 듬직한 나무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우연히 이 세상에 나왔다. 그렇지만 모두 저의 몫을 할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여기 이 자리에서 우리의 목숨을 살아낸다. 어린 잣나무라고 또 뭐가 다를까. 그 어린 잣나무를 위해서라도 어서 봄이 와 주기를 기다린다.
아침에 신문을 보니 내달 14일이면 제주에 개나리꽃이 피어 하루 37킬로미터씩 바람에 실려 북상한다고 한다. 개나리꽃이 피어도 눈은 내릴 테지만 밀려드는 봄이야 돌이킬 수 없다.
봄을 기다리며 추위에 떠는 새들이 있다. 언 땅에 묻힌 풀씨들이 있다. 산골짜기 어두운 바위틈에서 겨울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짐승들이 있고, 실낱같은 희망에 의지하여 봄을 기다리는 힘없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보다 위험한 산비탈 길섶에서 삶을 새로 시작하는 어린 잣나무가 있다. 그를 위해서라도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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