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함께 살아보려는 까치의 마음

권영상 2016. 2. 19. 21:46

함께 살아보려는 까치의 마음

권영상





전철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까치 한 마리가 길바닥에 떨어진 삭정이를 부러뜨리고 있었다. 주둥이로 물고 길바닥에 툭툭 두드린다. 그래도 부러지지 않자, 휙 내동댕이질을 친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 가던 길을 멈추고 이쪽 카센터 담벽에 섰다.


마침내 삭정이가 부러졌다. 까치가 부러진 삭정이 한 쪽을 물고 날아올랐다. 자연히 내 눈도 까치를 따라갔다. 가치가 거의 수직에 가깝게 상승하고 있었다. 민가의 지붕 위로, 7층 높이의 주상복합 건물 을 타고 날아올랐다. 사람에겐 가벼울지 모르겠지만 까치에겐 무겁다면 무거운 게 삭정이다. 그걸 물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무겁게 느껴졌다.




까치는 주상복합 건물과 붙어있는 제약회사 빌딩을 향했다. 나는 얼른 빌딩의 층수를 세었다. 20층이다. 까치는 절벽을 타는 크라이머처럼 가파른 외벽을 힘겹게 날아올랐다. 나는 까치가 향하는 그 빌딩 꼭대기를 쳐다봤다. 맨 꼭대기 외벽에 제약회사 이름이 박혀있는 글자 위에 까치집이 있었다. 까치가 물어올린 나뭇가지들이 수북하니 보였다.

고개를 치켜세우고 쳐다보는 내 입안이 말라왔다. 20층 건물 꼭대기 그 너머 푸른 하늘이 나를 목마르게 했다. 까치는 저렇게 까마득한 높이에 집을 짓는다. 저만한 집을 지으려면 까치는 대체 몇 번이나 몸에 버거운 삭정이를 물어올렸을까. 까치둥지 하나에 대략 800 여개의 삭정이가 필요하다는데 까치는 적어도 800번 이상은 날아올랐을 듯 싶다. 까치집은 수까치 혼자 짓는다고 하니 그 노고가 눈물겨웠다.




한 때 사람 곁에서 함께 살던 까치와 사람의 거리가 저만큼 멀어졌다.

언젠가 내가 근무하던 학교 운동으로 날아온 까치를, 뒤쫓아온 두 사내가 생각난다. 그들은 총을 들고 운동장에 뛰어 들어와 느티나무 우듬지에 앉은 까치를 잡아 돌아갔다. 그때 그들이 나를 보고 그랬다. “골치 아픈 놈이에요, 이놈들이.” 그들이 한전에서 왔다는 걸 보면 정전을 일으키는 범인이 까치라는 말투였다.




그러고 보니 20층 빌딩 위에 지은 까치집이란 어쩌면 인간이 쏘는 총알을 피할 수 있는 거리인지도 모르겠다. 그 안에 들어서면 까치는 목숨을 잃는다. 그래서인지 사람 손으로 건조된 인공물에 집을 짓지 않는 것이 야생동물의 본능인데 살기 위해 그 본능도 다 버린 듯 하다. 전신주나, 까마득한 아파트 타워 크레인 위에도 집을 짓는다. 그 위태로운 곳에 집을 짓고 위태위태 산다.




도시라는 게 지극히 사람 중심으로 만들어졌기에 우리는 새들을 외면한 채 우리끼리만 살아왔다.

그러느라 우리는 무서워졌다. 오랫동안 민가의 사람들과 친근하게 공생하며 살아왔던 까치를 우리는 불청객이니 ‘골치 아픈 새’로 만들고 말았다. 대체 우리 안에 숨겨진 어떤 무서운 성미가 길조라던 까치를 하루아침에 불청객으로 만드는가.

새뿐만 아니라 우리는 서로에게도 사악해졌다. 어제까지 존경받던 사람을 오늘 아침에 오물투성이로 만들어버리는 게 오늘의 섬찟한 우리들이다. 까치가 살던 터전을 우리가 빼앗아놓고 흠집 낸 과일과 정전사태를 모두 그들에게 뒤집어씌우는 건 사람의 고유한 심성이 아니다. 까치를 불청객이니 골치 아픈 새로 몰아갈수록 사나워지는 건 우리의 심성이다.




20층 빌딩의 가파른 외벽으로 피신해간 까치를 생각한다. 사람이 저렇게 멀리 하려하는데도 그 냉혹한 사람들과 같이 살아보려는 까치의 마음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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