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이가 창의적일까
권영상
학교를 떠난 지 3년째다.
그러니까 아이들의 작문을 본 지 그만큼 됐다는 뜻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가장 목마른 것이 아이들의 시와 산문을 접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실 세상에 물들지 않은 신선함을 우리가 사는 세속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곤 학교밖에 없을 듯싶다. 어른들은 끊임없이 진부해 가는데 반해 아이들은 늘 새롭다.
다행스럽게도 요 며칠 전, 초등학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동시 백여 편을 읽는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새로 다가오는 봄처럼, 새로 건립된 신생국가처럼 신선하고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어디서나 그렇듯 다 신선하거나 감동적이지는 않다.
초등학생들의 시를 읽을 때마다 겪는 일이 있다. 확연히 구분되는 두 부류의 시다. 동심이 오롯이 살아있는 시와 그리고 동심이 다 사라진 뭐 그렇고 그런 진부한 시다. 이 두 부류의 특징을 알면 그 누구도 좋은 시가 어떤 시인지 가려낼 수 있다.
읽어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글씨만 보면 안다. 동심이 잘 살아있는, 이른바 순수한 영혼을 만나볼 수 있는 시는 다르다. 필기용구가 다르다. 진부한 시가 반듯한 볼펜이나 펜 또는 뾰족하게 깎은 연필을 쓴다면 동심이 살아있는 시는 끝이 다 닳아 뭉툭해진 연필이거나 잉크가 말라가는 희미한 사인펜 정도가 그들의 것이다. 진부한 시가 잘 깎은 연필로 반듯반듯하게 글씨를 쓰거나 문장 부호마저 정확하게 챙겨 쓴다면 동심을 간직한 시는 글씨가 괴발개발이다. 문장부호는 물론이요 띄어쓰기조차 기대할 게 없다. 가만히 보면 글씨가 '예술'이다.
진부한 시를 쓰는 아이들이 교과서 글씨체를 닮아간다면 동심을 간직한 시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글씨체를 고집한다. 좋은 말로 하자면 보편화된 글씨체를 거부한다는 거다. 비록 자신의 글씨가 엉망이어도 그것을 사랑한다. 개성적이다. 그런 까닭에 한 자 한 자 읽어가는 일이 힘겨울 때가 많다. 부러진 연필심을 간신히 세워 쓴 글씨거나 연필심이 다 닳아 이빨로 연필을 벗겨가며 쓴 글씨들이라 읽기가 힘들다.
레이아웃은 어떤가.
진부한 시를 쓰는 아이들이 반듯한 네모 종이의 틀 속에 일정하게 줄을 맞추어 글을 쓰거나 또 상황에 맞게 행과 연을 구축해낸다면 동심을 간직한 아이들은 그것을 혐오한다. 그들은 자유로운 영혼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써놓은 한 편의 시의 모습은 서거나 눕거나 기대거나 쓰러지려 하거나 다양하다. 잘 다듬어진 반듯한 틀과 모양을 단연 거부한다. 외형을 갖추기 위해 생각을 낭비하기보다 오직 생각과 감정의 유로에 집중한다. 그러다 보니 글줄이 맞지 않는 건 예사고, 레이아웃에 신경 을 쓴다는 건 어림없는 이야기다.
두 번째는 내용이다.
진부한 시가 학습을 통해 익힌 보편화된 지식을 사랑한다면 동심을 간직한 시는 남의 지식보다 자신만의 내적 경험을 더 사랑한다. 진부한 시의 소유자는 비교적 현실순응력이 뛰어나다. 다시 말해 자기 고유의 생각이나 감성을 버리고, 다른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놓은 보편적 지식을 쉽게 따르려는 습성이 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쓴 글의 내용에는 자연히 자신의 감성보다 자신이 배운 이러저러한 지식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것은 이미 나의 것보다 남의 것, 다시 말해 교과서에 구축되어 있는 지식이 더 좋은 점수를 얻는 길이란 걸 나름대로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글에는 누구나 다 아는 죽은 지식만 있지 파릇한 나만의 감성이 없다.
동심을 간직하고 있는 시들은 대개 자신만의 독특한 경험이나 상상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레몬을 깨문다. 아우셔라!”
“쉬박의 유혹에 넘어가/ 앗! /그만 이불에 싸고 말았어.”
이들은 ‘아유, 시어!’를 ‘아우셔라!’로 쓸 줄 안다. 말의 구조와 말법에 관심이 없다. 수박을 너무 먹어 이불에 오줌을 저려본 경험자들이라 수박을 아예 ‘쉬박’이라 부르는 일조차 주저하지 않는다. 거기다가 이불에 오줌 눈 것조차 과감히 밝힐 줄 안다. 우리가 잘 아는 오탁번 시인은 시의 핵심은 자신의 부끄러움은 밝히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들은 이미 시인의 감수성을 충분히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오줌도 ‘누다’가 아니고 ‘싸다’다. 구부리고 누그러뜨린 말이 좋은 시어인 듯 하지만 때로는 직설적인 말이 더 어린이다울 수가 있다.
이쯤에서 멈추어야겠다.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좋은 동시 구별법이 아니다.
창의성에 관한 질문 때문이다. 요즘처럼 창의성을 부르짖는 때도 드물다. 이제 우리의 국력이 그걸 원할 때가 됐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대체로 진부한 시의 소유자들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란 이미 누군가가 구축해놓은 지식이나 지식체계를 잘 외거나 따르는 아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고유성보다 세상이 이미 축적해놓은 남의 정보를 숭상한다. 그것이 그들의 맹점이다. 남을 뒤쫓다가 그들을 잃어버렸을 때 그들은 쉽게 낙망한다. 자신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 갈 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과 감성을 키워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지금은 세상이 말하는 보편적인 행복을 뒤쫓아 갈 때가 아니라 나만의 행복을 내가 만들어가야 할 때다. 세상을 따라가느라 허둥댈 게 아니라 고유한 나의 길을 걸어갈 때 좀 적게 가져도, 좀 느려도, 좀 덜 이루었다 해도 나는 행복할 수 있다.
내 아이는 창의적인 아이인가.
내가 아는한 글씨가 반듯반듯한 아이는 대체로 창의성과 거리가 멀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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