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사이
권영상
안성 오두막집에 내려왔다. 아침에 일어나니 비다. 겨울비다. 내가 못 들어 그렇지 비는 간밤 내내 왔다. 마당이 흠뻑 젖었다. 가스불을 켜 국을 데우고 아내가 챙겨준 반찬으로 아침을 들 때다. 연말 기분 탓인지 여느 때와 달리 적적하다. 라디오를 켰다.
흐르던 음악이 끝나면서 진행자가 다음 곡을 청한 신청자들을 소개했다. 아버지를 저 세상에 묻고 마음이 아파 음악을 신청한다는 이, 아침에 출근해 난로에 불을 피우다가 아끼던 외투 자락을 태워 기분이 안 좋다는 이, 아들이 수시입학 원서를 냈는데 오늘이 발표일이라며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란다는 이, 그리고 방금 동생이 첫 아기를 낳았다면서 건강하게 자라주기를 바란다는 이들이었다.
“이분들의 밝은 아침을 위해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혼자 아침을 먹고 있었다.
어제와 오늘 사이, 누군가는 아버지를 다른 세상에 보내고, 누군가는 난롯불에 외투자락을 태우고, 누군가는 수시합격을 기다리느라 마음을 졸이고, 또 누군가는 아기를 출산했다. 간밤에 비 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내가 잔 사이, 내가 딛고 사는 이 땅에선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또 그 일로 하여 아프고, 슬프고, 가슴 졸이며 하루가 왔다.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의 모습이다. 어느 땅에선 끊이지 않고 자살 폭탄이 터지고 그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는 죽음을 맞는다. 공중을 날던 여객기가 미사일에 격추되고, 지진으로 수많은 이들이 매몰되고, 이슬람국가라는 단체는 그들만의 축제를 벌이듯 무고한 이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내전을 피해 살던 땅을 탈출하는 이들만도 수 없이 많다. 우리가 사는 이 지상에는 하루도 총소리가 그칠 날이 없고, 하루도 사람이 살상당하지 않는 날이 없다. 자식 양육이 힘들어 출산을 포기한다는 젊은이들의 비참한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뉴스가 아니다. 이곳이 우리가 사는 곳이다.
근데, 그런 이 땅에서 어제와 오늘 사이, 음악 한 곡이 끝나고 다시 한 곡이 시작하는 그 사이 누군가는 아기를 낳는다. 그리고 누군가는 대학 졸업해봐야 기다리는 것은 비정규직뿐이라는 그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마음을 졸이고 있다. 이 순간에도 생명의 끈을 움켜쥐며 투병하는 이들이 있고, 단칸방에서 두 칸 방으로 가기 위해 부푼 마음으로 이삿짐을 꾸리는 이들이 있다. 장한 아들을 업어주는 아버지가 있고, 늙은 어머니의 가슴이 생일 꽃을 달아주는 자식의 손이 있다.
이곳이 살만한 세상이 못 된다는 이도 있지만 이곳이 천국보다 아름답다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아침이 오면 뜨거운 해가 떠오르고, 밤이 되면 별들이 반짝인다. 세상 모든 아기들치고 별들의 축복을 받지 않고 태어나는 아기는 없다. 70억 인구의 생일축하 노래는 하루도 그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이곳은 총성이 아니라 축하의 노래가 그치지 않는 곳이다.
2016년의 새해 첫 아침이다.
한 해가 가고 다시 한 해가 오는 어제와 오늘 사이, 어느 FM에서 소개된 음악과 음악 사이에 있었던 일들처럼 또 하루가 시작된다. 아기를 낳고, 집을 늘려가고, 설레는 마음으로 대학에 들어가고, 아들이 장해 그 아들을 업어주는 아버지가 사는, 그런 새해를 또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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