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을 맞는 축복
권영상
사는데 있어 새롭고 신선한 일이란 게 별로 없다. 늘 그 일이 그 일이다. 그나마 그 일이란 게 조금씩 달라서 다행이다.
근데 오늘은 아니다. 자고 일어나니 아침부터 함박눈이다. 눈도 눈도 푸짐하다. 내 일상으로 본다면 특종감이다. 초겨울에 이토록 푸짐히 내리는 눈은 처음이다. 창가에 나가 바깥을 내다보는데 창문이 미어터지도록 눈이다. 천지간에 눈 아닌 데가 없다.
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아무래도 산에 가야겠다.
“아니, 이 눈길에 웬 산이래?”
아내가 괜히 한 마디 한다. 그렇긴 하지만 잔소리를 물리치고 집을 나왔다. 문밖이 황홀한 천국이다. 새롭고 신선하기를 바란다면 이 겨울에 대설만한 것이 없다. 이런 좋은 일이란 늘상 일어나지 않는다. 늘상 일어난다 해도 우리 곁에 오랫동안 있어주지 않는다. 그저 잠깐 왔다가 사라진다는 걸 겪어서 안다. 밥 한 술 떠먹고, 양말 한 장 더 신고, 눈보라에 맞는 모자를 고르고 찾고 하다 보면 산 근처에도 못 가 눈은 덜컹, 그치고 만다. 좀 춥고 좀 배고파도, 좀 성가셔도 그 즉시 되는 대로 챙겨 떠나야 한다. 우리 곁에 닥쳐온 이 좋은 풍경을 놓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한 발짝 마당에 나서자, 빗금을 그으며 쏟아지는 눈보라에 마음이 술렁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들은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마당가에 선 늙은 느티나무가 가을바람에 느팃잎을 쏟아낼 때에도 내 마음은 흔들렸다. 길거리 벚나무 흰 벚꽃이 골목 가득히 흩날릴 때도 내 가슴은 마구 뛰었다. 나는 미친 듯이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 앞에서 먹먹해 오는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는 아파트 후문을 나와 부랴부랴 산을 향했다. 산은 남부순환도로 건너편에 서 있는 우면산이다. 우면산이 거대한 눈보라에 뒤덮여 뿌옇게 보인다. 입새에 들어섰다. 하늘을 감싸고 서 있는 나무들이 눈 터널을 만들었다. 그 안에 들어서자 가보지 않은 천국처럼 산이 온통 은빛으로 형형하다. 새벽부터 내린 눈으로도 산은 제 빛깔을 잃는다. 나무 위에서 주먹만한 눈덩이들이 툭툭 떨어지며 내 어깨를, 내 머리를, 내 무릎을 내리친다.
눈에 정신을 잃으며 산길을 오르고 있을 때다.
저만치 산비탈에 서 있는 참나무 한 그루가 울찔, 울찔 하더니 아래쪽으로 커다란 몸을 내던진다. 산이 일시에 울었고, 주변의 나무들이 일시에 눈을 날려 올렸다. 눈보라 폭풍이 한 동안 일었다. 일파만파. 근방의 나무들은 또 그 근방의 나무들을 흔들고, 여파는 여파를 낳으며 겨울숲이 풍파 아닌 평지풍파를 겪었다.
나는 그 기막힌 풍경에 치를 떨었다. 나무 한 그루 쓰러지는 일이 이 산속에선 예삿일이 아니다. 산이 울부짖었고, 눈이 몸부림 쳤다. 지난달에도 그랬지만 새로이 들어서는 12월도 하루가 멀다 하고 비와 눈이 내렸다. 산비탈 땅이 무를 대로 물러 있었던 거다.
나무 한 그루가 이 터전에 살다가 눈 내리는 날을 받아 눈 무게에 못 이겨 세상을 떴다. 소나무가 많은 눈 내리는 고향의 겨울밤엔 눈의 무게에 쩡쩡, 부러져나가던 나무들의 울부짖음이 있었다. 그런 밤엔 잠이 오지 않아 마당 눈빛에 어리던 파란 창호문을 바라보며 긴 겨울밤을 보냈다.
참나무 한 그루가 이렇게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사라졌다.
잠깐이면 눈도 그치려니 했는데 아니다. 산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눈발이 점점 거세어진다. 정상에 있는 소망탑에서 계단길을 밟아 돌아내려올 때쯤이다. 하늘이 멀개지더니 해가 난다. 벌써 이쪽 도심 쪽의 산비탈엔 눈이 다 녹고 있다.
그때에야 서둘러 녹는 눈길을 밟으며 사람들이 하나 둘 올라오고 있다. 등산가방도 메고, 빵모자도 쓰고, 스틱이며 장갑을 끼고 올라온다. 이것저것 챙기다가 한발 늦은 게 분명하다.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한 번 더 눈이 푸짐하게 내려줬으면 좋겠다.
오늘은 내가 아는 것과 달리 함박눈 내리는 이 좋은 시간이 짧지 않았다. 살아가는 내내 좋은 시절이거나 좋은 일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히 가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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