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나는 망치다

권영상 2015. 11. 30. 16:02

나는 망치다

권영상

 

 

 

 

 

겨울을 앞에 두고 현관에서 거실로 들어오는 입구에 중문을 해달았다. 그러느라 늘 걸려있던 길다란 전신 거울이 자리를 잃었다. 현관에 상반신 거울이 있건만 전신거울을 고집했다. 이리저리 고민 끝에 마땅한 자리를 잡았다. 세멘트못과 망치를 찾아들고 아파트 벽을 두드려 박고 끝내 거울을 달았다.

 

 

 

나는 남편의 소임을 했고, 망치는 망치의 소임을 다 했다. 제 소임을 다한 망치를 베란다 공구통 넣어놓고 돌아서다 다시 들여다 봤다. 공구통이라 해 봐야 별 게 없다. 늘 함께 있던 펜치와 드라이버는 자주 쓰는 통에 거실 연필꽂이에 꽃혀 있다. 기껏 있다는 게 낡은 접이식 톱 한 자루와 커텐을 매다는 핀과 크고 작은 나사못과 어디서 굴러들어왔는지 압정이며 실핀, 공구도 아닌 목화씨가 든 솜과 빨래집게들이 차지하고 있다.

 

 

 

나는 방금 내려놓은 망치를 다시 집어들었다. 투박한 나무 손잡이는 예전의 디자인이라 그런지 모양새가 없다. 자루가 헐거웠던지 쇠망치 구멍에 헝겊이 박혀있다. 쇠망치 부분이 일부 일그러졌을 뿐 말쑥하다. 펜치나 드라이버처럼 자주 쓰이지도 않고 보면 망치는 늘 여기 공구통에 누워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빈둥빈둥 잠이나 축내고 있었을 게 뻔하다.

망치를 잡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 아, 가끔 부럼을 깨느라 호두알을 두드린 기억이 있다. 아내가 북엇국을 끓인다며 북어를 두드린 적도 있다. 그러고는 오늘처럼 거울을 걸 자리에 못을 박은 것이 전부다. 목수의 손에 잡혀 못을 때려박던 그런 노릇 한번 못해보고 도시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일없이 누워있는 망치가 쓸쓸해 보인다.

 

 

 

얼마 전 베란다 천장에 빨래건조대를 달 때다. 동네 공구상에서 사람이 왔었다. 그는 드릴로 천장벽을 뚫고 건조대를 달아주고 갔다. 망치 한 번 쓰지 않고 드라이버로 마지막 작업을 간단히 했을 뿐이다. 그 일을 여기 베란다 공구통에 누워 있는 망치가 못 보았을 리 없다. 자신이 해야할 일을 별 소음없이 간단해치운 걸 보며 망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 망치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결국 쾅쾅 벽을 울리며 못을 때려박는 완력에 의존할 뿐 망치는 다른 테크닉을 모른다. 그저 못대가리와 맞서 온몸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것을 미덕이라 생각하는 것이 망치다. 그는 보기에 따라 우직하고, 헌신적이며, 오직 한 가지만 아는 충직한 족속이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원시적 방식의 그를 반기는 이는 없다.

 

 

 

나무못보다 나사못을 주로 쓰는 가전제품에 맞는 공구는 망치가 아니다. 드라이버다. 무거운 장도리보다 손에 맞는 작은 펜치가 더 적응력이 뛰어나다. 톱도 세멘트로 건축된 아파트에선 별소용이 닿지 않는 공구다. 망치와 톱은 공구의 우두머리다. 그러던 것들이 이제는 그 자리에서 밀려나고, 그 이전에 소외받던 하위공구들이 사랑받게 되었다. 추운 베란다가 아닌 따뜻한 거실, 그것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연필꽂이나 책상 서랍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잡았던 망치를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는다.

그때 불현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혹시 이 망치와 같은 처지는 아닐까, 하는. 한 때 가장으로서 가정에 헌신하던 나도 지금은 망치처럼 일이 없이 빈둥거린다. 어쩌다 호두알을 깨는 데나 한번 쓰일 뿐 별 소용에 닿지 않는 망치가 내 처지와 같다.

빨래 건조대의 못도 내가 아닌 공구상을 불러 박고, 컴퓨터의 다운로드 한 건을 받는데도 쩔쩔매는 나는 어쩌면 한물 간 망치다. 한 때 모든 일에 앞서 걸어가던 나는 언제부턴가 아내와 딸아이에게 묻는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구글에 새로운 계정을 만들어 새 이름으로 업데이트 하라는 컴퓨터 사인이 무슨 말인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와 단 둘이 연민의 밤을 보내고 싶다  (0) 2015.12.10
함박눈을 맞는 축복  (0) 2015.12.03
이후  (0) 2015.11.26
엄마가 그림책 읽어드릴게요  (0) 2015.11.24
끝물고추에 대한 그리움  (0) 2015.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