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단 둘이 연민의 밤을 보내고 싶다
권영상
이틀 후면 8센티 정도의 눈이 경기남부 지역에 내린다는 예보가 나왔다. 나는 안성으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내려갔다가 묶이게 되면 어쩌려고?”
아내는 걱정했지만 나는 아니다. 내려갔다가 서울로 올라오지 못할까가 걱정이 아니라 올라오지 못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마음 정도가 아니라 그걸 즐기고 싶었다. 자동차가 다니는 한길에서 안성집까지는 농로다. 그 중에서 그래도 인적이 있는 마을까지는 길이 나겠지만 그 이후부터는 저절로 녹지 않는다면 고립이다. 그 길에는 가파른 언덕길로 있고, 내리막길도 있다.
그러니 고립이야 불을 보듯 뻔하다. 나는 가끔 고립이 좋다. 길이 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립. 비겁하긴 하지만 그게 내 탓이 아닌, 어떤 그 무엇의 힘에 의해 불가피하게 발이 묶인, 그런 고립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 가끔 해외에 나갈 때면 갑작스런 현지 사정으로 몇 주간 귀국을 못하게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직장 일로 먼 섬에 갔다가 천재지변을 당해 며칠간 오도 가도 못할 일이 좀 일어나 줬으면 하는 그런 꿈을 꾸어본 적도 있다. 나만 그런가.
한 십여 년 전 일이다. 개학을 이틀 앞두고 갑자기 백령도 두무진이 보고 싶었다. 거기 가 하룻밤 머물고 돌아올 생각으로 인천에서 백령도행 여객선에 올랐다. 신용카드라는 게 없던 시절, 나는 주머니에 든 여비를 믿고 있었다. 근데 백령도에서 하루를 자고 돌아오려고 항구에 나가니 파도가 높아 출항이 통제됐다는 거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당시만 해도 민간여객선은 거기 주둔하는 군부대의 통제를 따라야 했다.
“지금이 그믐사리니 날이 좋아지려면 사나흘은 있어야…….”
숙식을 한 집주인의 말이 그랬다. 사리는 한 달에 보름 그믐 두 차례 오는데 이때가 되면 조수가 높아져 당연히 파도가 높다는 거다. 내가 그걸 알 리 없었다. 걱정인 것은 사나흘 뒤면 학교는 개학한지 이틀이 지난 뒤다. 교편을 잡고 있던 나로선 황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더욱 황당한 건 그때까지 머물 숙식비가 없다는 거였다. 그때 나는 백령도에 있는 학교를 찾아가 내가 근무하는 학교와 통화한 뒤, 숙식비를 빌렸다. 그러고 간신히 하룻밤을 더 잔 뒤 돌아 나온 기억이 있다. 그때 내 마음은 이래저래 편치 않았다. 개학을 앞두고 섬엘 찾아간 것 자체가 좀 경망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누구에게 피해를 줄 일이 아니다.
차를 몰고 오는 길에 나는 백암시장에 들렀다. 고립을 대비해 우선 다섯 개들이 라면 세 봉지와 김치 두 봉지를 샀다. 이거라면 적어도 최후까지는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성집에 도착하는 대로 우선 나무들마다 짚으로 옷싸개를 해주었다. 마당에 있는 수도도 두툼한 헌옷으로 감싸주었다. 점심밥을 입에 대기도 전에 벌써 눈발이 치기 시작했다. 시작이 어렵지 한번 내리기 시작한 눈은 금방 거세어졌다. 함박눈이었다. 눈송이가 털썩털썩 마당에 주저앉았다. 머지않아 길 건너 파란지붕 할머니댁으로 가는 길이며 목수 최씨 아저씨네 집으로 가는 길도 끊겨버리고 말 것이 분명했다.
내 몸 속에서 고립의 기쁨이 고개를 들었다. 어른들로부터 들어오던, 지붕 위까지 눈이 쌓여 굴을 파고 옆집을 오갔다는 이야기는 위기라기보다 오히려 고립의 즐거운 상상이다.
나는 백령도의 고립 외에 제대로 된 고립의 기쁨을 잘 모른다. 그러나 지금처럼 눈이 무지무지 내린다면 그 경험도 임박했다. 내가 왜 젊은 시절부터 가끔 어딘가에 혼자 갇혀 보고 싶었는지, 그 이유를 곧 알아내게 될 것 같은 밤이 오고 있다.
어두운 밤, 창문을 연다. 눈은 여전히 내린다. 길앞 보안등불만 부옇게 보일 뿐 눈 내리는 밤은 소리없이 고적해진다. 여기 이 시골집에 갇혀 두어 달 피골이 상접해지도록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왜 자꾸 이런 생각을 할까.
우리는 모두 남 보기에 허허거리며 살지만 실은 세상과 부딪히며 사느라 수없이 많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 험한 세상을 잠시 떠나있고 싶은 마음이 내게 있다. 오늘은 그런 나와 단 둘이 슬픈 연민의 밤을 보내고 싶다. 눈이 오래도록 수북수북 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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