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싸이의 ‘내 어깨 뽕 들어가지’

권영상 2015. 12. 14. 12:36

싸이의 ‘내 어깨 뽕 들어가지’

권영상

 

 

 

 

 

골목길을 내려오고 있을 때다. 길갓집에서 싸이의 ‘나팔바지’가 날아온다. 배 고픈게 싹 가신다. 오히려 빈속에 술 한 잔 쎄게 들어간 듯 내 몸이 건들댄다. 내가 웃긴다. 내 나이가 몇인가. 내 나이가 몇인데 건들건들 건들대는 반응이 나오나.

“내 신발은 광이 나지/ 내 여자는 쌈빡하지/ 내 어깨 뽕 들어가지.”

흥얼거리며 골목길을 따라 내려온다.

‘나팔바지’ 속의 싸이는 확실히 속물이다. 그러나 탁 까놓고 말하는 그의 속물 본성이 나는 좋다. 속물이면서 속물 아닌 척 잘 난 체하는 위인이 나는 싫다. 가짜 속물보다 솔직한 속물이 더 좋다. 싸이는 자신의 속물성을 아주 야하게 고백한다. ‘내 어깨 뽕 들어가지’ 하고.

 

 

 

싸이의 음악도 놀랍지만 싸이의 노랫말도 충격적이다. 지금껏 우리가 들어온 대중가요에 이만큼 리얼한 가사가 있었을까. 그저 갈증만 더하는 사랑타령이거나 실연타령이 전부였다. 대중음악의 특성은 통속성이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통속성 안에 풍덩, 제 몸을 던지지 못 해왔다. 대중의 열광을 먹고 산다면서도 이른바 그럴 듯한 음악성이라는 틀 안에 어정쩡하게 머물렀다.

진정으로 대중을 사로잡고, 미치게 만들고, 열광하려 하게 한다면 그 어정쩡한 경계를 부수어야 한다. 싸이의 음악이 그런 파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 증거가 이 유치찬란한 속물적 노랫말이다. 이런 노랫말은 그의 다른 음악 ‘대디’에서도 발견된다. ‘까고 말해 봐요’, ‘나 너무 좋아서 뻑가’ 가 그렇다.

 

 

 

누구나 두루 쓰는 말이면서도 공적인 자리에서 선뜻 쓰기 꺼리는 말, 정통어법에서 벗어난 말이 그가 즐겨 쓰는 노랫가사다. 광낸다거나 쌈빡하다거나 뽕 들어간다거나 뻑 간다는 이런 말은 슬랭어다. 속되다면 속된 이런 말들이 그의 노래 속에서 발칙하게 살아나 그의 음악은 색채가 더욱 분명해졌다. 그의 노래가 단지 폼 내기 위한 부르는 게 아니라는 것, 단지 교양있는 대중가수 하자고 가수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는 대중을 확실하게 사로잡기 위해 비정통 어법을 택했다. 노골적이면서 담대한 그런 힘은 어디서 왔을까. 솔직성에서 왔다. 그 점이 그의 노래를 살리고 있다.

 

 

 

“다르다고 틀리다고 하지 마”, “판단을 하지 마 그냥 느끼라니까”.

싸이가 경멸하는 게 있다. 권위다. 뭣 좀 안다고 넌 우리와 달라, 하며 잘난 체 하는 권위다. 먹물 좀 먹었다고 깝치고, 교양 교양 하며 판치고, 차별하며 저들의 권력을 만들어가는 권위. 싸이는 그들을 향해 소리친다. 나 이런 사람이야. 남의 인생 끼어들어 판단하지마! 하고.

 

 

 

“맛이 안 가지 나 원래 맛 간 놈이니까/ 얼굴 두껍지만 지갑도 두껍지 나.” 잘난 네가 말한 대로 나 이미 맛도 가고 얼굴도 두껍지만 내 지갑도 두껍다고 한 소리 한다. 싸이가 가소롭다. 가소로우면서도 그가 솔직하다. 맛이 간 그에게 돈까지 없다면 그건 또 얼마나 슬픈 일인가. 돈 없어 구두코에 광 한번 못 내보고, 쌈빡한 여자 친구 하나 가질 수 없다면 그건 또 얼마나 억울할까.

 

 

 

정직하다. 쌈빡할 정도로 싸이는 정직하다. 차마 대놓고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내뱉을 줄 아는 이 맑은 속물성. 이 정직한 속물성이 어쩌면 젊은이들을 흥분케 하는지 모르겠다. 생일 선물 대신 돈을 달라는 아내의 요구가 적은 돈으로 뭘 살까 고민하는 내게 때로는 아쌀해서 좋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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