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들길을 걷다
권영상
꽃씨 온상에 물을 주고 집을 나섰다. 들판을 한 바퀴 돌아오는 일이 남았다. 벽장골 앞에 서니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건넛마을이 궁금하다. 방향을 그쪽으로 돌렸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모르는 곳이지만 모르기는 마을 이름도 모른다.
마침 전동휠체어를 타고 오는 분에게 여쭈었다.
“내장리라고......”
머리칼 하얀 할아버지가 오시던 길을 돌아보며 마을 이름을 알려 주셨다.
충청도가 가까운 게 분명하다. 마을이름이 내장이라? 지명이 어색하다. 음성, 괴산, 생극, 증평, 맹동, 삼죽, 일죽……. 이런 괴이한 한자 지명이 등장하면 충청도거나 아니면 그 인근이다.
내장리로 가기 위해 개울을 끼고 가는 비포장 둑길을 택했다. 이제 농촌 길도 다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어 길 걷는 맛이랄 게 없다. 웬만한 길은 구석구석 밭둑까지 포장 되어 있다.
개울 둑길도 포장이 되어 있는데 그중 포장 안 된 길을 택했다. 땅이 무르다. 발밑이 물렁물렁하다. 새로 돋는 풀과 지난해 말라버린 풀이 엉켜 속이 빈 듯 푹신푹신하다. 솜이불 위를 걷는 기분이다. 몸이 붕붕 뜨는 듯 가벼워진다. 어쩌다 풀 없는 곳을 디디면 신발바닥이 흙길에 짝짝 달라붙는다. 이게 흙길 걷는 맛이 아닐까.
개울둑 비탈엔 지난해에 어른 키만큼씩 자란 갈대가 모진 겨울을 나느라 꺾이고 쓰러져 있다. 개울바닥엔 모래를 밀어내고 흐르는 물길이 고불고불하다. 이른 봄이라 물의 양은 적지만 맑다. 나는 감촉이 좋은 물렁물렁한 개울 둑길을 따라 풀잎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산등성이가 개울과 같은 방향으로 길게 누웠다 가는 우묵한 자리마다 소복소복 마을이 있다. 대여섯 집, 아니면 예닐곱 집. 그리고 사이사이 채소가 크고 있을 비닐하우스들. 집집마다 울타리를 지키는 살구나무 분홍살구꽃, 마을의 가운데에 서 있는 연둣빛 치렁치렁 물오른 버드나무.
개울 이쪽 산 아래 마을도 그 풍경이 별반 다르지 않다. 마을로 들어가는 시멘트 길이 있고, 그 길이 산 어귀에 닿는데서 대여섯 집이 모여 있다. 화사한 매화꽃과 목련꽃, 외로이 선 노란 산수유, 개나리꽃이 마을 집들과 어울려도 참 잘 어울린다.
나는 개울둑에 우두커니 서서 마을 풍경을 본다. 거기가 거기 같고, 거기가 또 거기 같은 풍경이어도 볼수록 정겹고 친근하다. 그 풍경에 반해 나도 모르게 ‘아, 좋다! 여기 와 살걸!’, ‘여기가 좋은데.’ 그러며 웃는다. 내가 사는 마을을 누군가 지나간다면 그도 나처럼 ‘여기 와 살걸’ 그 말을 하였을 고향같이 다정한 것이 우리네 마을이다.
아마 한 시간을 걸었을까. 개울둑에서 논두렁길로 내려섰다. 논두렁길 끝에 아담한 마을이 나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논은 모두 건답이다. 지난해 추수한 벼 그루터기 사이로 쇠털골이 파랗게 자란다. 넘어질까 봐 양손을 펼쳐들고 좁은 논두렁길을 걷는다. 건답논의 논두렁길이라 봄쑥이 뽀얗게 큰다. 민들레며 소루쟁이도 여기저기 나와 있다. 그들을 빼면 논두렁을 뒤덮고 있는 건 냉이거나 꽃다지들이다. 논두렁이 그들 꽃으로 노랗다. 바람이 불면 마치 논두렁길이 흔들흔들 흔들리는 것 같다.
논두렁길을 다 걸어 나왔다. 그쯤에서 내가 걸어온 들을 바라본다. 펀한 찻길로 왔으면 금방 올 길을 개울둑으로 논두렁으로 빙 돌아왔다. 그래도 빙 돌아온 내 걸음이 싫지 않았다. 급할 게 없는 내게 좀 늦게 돌아온단들 그게 무슨 문제가 될까.
하얗게 핀 매실밭으로 들어가 매실나무 사잇길로 고개를 숙여 걸어 나오니 그제야 한길이다. 먼데서 볼 때는 몰랐는데 집집마다 담장 옆에 마늘밭을 두었다. 멀칭을 한 마늘밭엔 마늘이 크고, 겨울을 견뎌낸 쪽파가 검푸른 빛을 내뿜으며 서너 이랑씩, 예닐곱 이랑씩 오랍뜰 텃밭에서 큰다.
먼데서는 안 보였는데 자두나무, 배나무 끝엔 파란 새 움이 트고, 먼데선 안 보였는데 집마당엔 상사화 잎이 소복소복 나왔고, 원추리가 뾰족뾰족 부리를 내밀었다. 정말 먼데선 안 보였는데 뜰앞 양지짝엔 분홍 꽃잔디가 눈부시게 피고 있다.
“월! 월!”
안 보이던 개가 한 마리 마당에 나와 점잖게 나를 보고 짖는다. 하얀 순둥이 개다. 이악스럽게 덤벼들듯 짖는 게 아니고 두어 번 딱 짖어보고 만다. 충청도가 가까워 그런지 개들마저 분별력이 있고, 예의범절이 특출하다. 손을 흔들어 보이자, 부끄러움을 타는 소년처럼 슬그머니 제 집으로 든다.
삼죽면사무소가 멀리 내다보이는 곳에서 아쉽지만 돌아섰다.
낯선 길을 갈 때와 달리 올 때는 금방 왔다.
안성에 내려와 오늘처럼 먼데까지 걸어가 보기는 처음이다. 봄이 완연히 오거든 또 한 번 가보고 싶다. 그때는 주머니에 술값을 넣어가 다리 아플 때쯤 어느 가게에 들러 쉬는 삼아 술을 딱 한잔 하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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