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만나러 가는 나비들
권영상
창밖에 눈이 내린다. 푸슬푸슬 내리는 눈을 보며 꽃을 찾아가는 나비를 생각한다. 나비에겐 태어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들판을 향하는 버릇이 있다. 그게 꽃을 만나러 가는 용기다.
나비는 사람과는 다르다. 우화하자마자 그 누군가의 보호도 없는 세상과 맞부딪힌다.
나비의 삶은 겉보기와 전혀 다르다. 위험천만하다. 우화하는 순간부터 포식자의 눈에 노출되기 쉽다. 우화에 실패할 경우 무엇보다 생명 유지가 어렵다. 나비에게 있어 삶이란 순간 순간 위험하지 않은 고비가 없다. 그러나 특히 위험한 것은 그의 변태다.
나는 나의 글쓰기 방식을 바꾸려할 때마다 나비의 변태를 생각한다. 나비애벌레의 먹이는 초록식물이다. 기본적으로 애벌레의 먹이가 되는 초록식물은 그 양이 풍부하다. 풍부한 먹이를 앞에 놓고 먹는 일에 근심 걱정이 없을 때 제대로 된 애벌레라면 자신에게 한번쯤 질문을 던진다.
“산다는 게 뭘까. 먹고 살기 위해 사는 걸까.”
누구나 풍족함의 유혹을 물리치기 어렵다. 그러나 산다는 건 내 한 몸 먹고 살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종족 번식의 의무를 저버릴 수 없다. 종족을 번식하려면 나비가 되어야 한다. 왜 나비가 되어야 하는가? 수월한 교미 체형을 갖기 위해서다. 체형만 갖추면 되는가. 아니다. 유전자를 전하려면 단백질이 필요하다. 초식을 하는 애벌레가 나비로 변태해야하는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애벌레는 고치 속에 자신을 가두는 모험을 해야 한다. 고치 속은 자신을 뜯어 바꾸는 무시무시한 외과병동이다. 모든 기관을 다 바꾸어야 한다. 그동안 풀잎을 갉아먹으며 살아왔던 구강기관을 꽃꿀을 빠는 긴 대롱 형태로 바꾸어야 한다. 꿀 속의 단백질을 얻기 위해서다. 식성을 바꾸려면 당연히 소화기 기관도 바꾸어야 하고, 비상을 하기 위해선 심폐기관도 바꾸어야 한다. 물론 없던 날개를 만들고, 가벼이 착지할 수 있는 여섯 개의 다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먼 거리에 있는 꽃을 찾아내는 시각과 꿀 향기를 느끼는 후각기관을 새로이 설계해야 한다.
가히 새로 태어나는 수준이다. 제 2의 탄생이라고나 할까.
고치 속에 머물러 있는 동안 나비에겐 그런 혁명이 있었다. 자신의 몸을 재건축 해내는 혁명이다. 그 일은 또 얼마나 위험했던가. 어느 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할 때 변태는 실패하고, 그는 죽는다.
우리가 무심코 보는 나비에겐 그런 인생이 있다. 아슬아슬한 벼랑 끝 역정이 있다. 그것을 거친 나비라야 지상을 이륙해 상공을 나른다. 그리고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들판으로 꽃을 찾아간다. 대견하지 않은가. 저렇게 작은 생명에도 잔인할 만큼의 위태위태한 고비가 그의 삶 위에 깔려있다. 그걸 생각하면 나비에게 경배를 드린대도 부끄러울 일이 없다.
“나비다! 노랑나비!”
이 외침이야말로 경이로운 축복의 언어다.
시인은 늘 탈태를 꿈꾼다. 구태를 벗고 전혀 달라진 모습의 나비를 꿈꾼다. 그렇게 해서 그의 시가 다시 태어날 때, 사람들은 그의 시를 향해 나비다! 를 외친다. 또 한 번의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경이로움의 순간이다.
머지않아 봄이 오면 그 맨 앞에 나비들이 있을 테다. 꽃을 찾아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들판으로 날아가는 나비의 뒷모습이 보고 싶다. 아니,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비를 닮은 나의 모습이 보고 싶다.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다리, 새로운 세상을 연결해주다 (0) | 2015.02.22 |
---|---|
아빠 입은 옷 어떠냐 (0) | 2015.02.21 |
설 잘 쇠세요 (0) | 2015.02.17 |
두레박우물물 길어올리기 (0) | 2015.02.08 |
우물이 있는 고향 (0) | 2015.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