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 새로운 세상을 연결해주다
권영상
창문틀에 흠이 생겨 페인트를 풀어 칠했다. 그러고도 조금 남았다. 칠할 곳이 있을까 하고 여기저기 집을 둘러보았다. 마침 뒤뜰 쪽 처마에 페인트 벗겨진 부분이 있다. 칠은 지난해에 했다. 그런데 벌써 벗겨지는 곳이 생긴다. 나는 처마를 칠하려고 방안에 들어가 창턱에 올라섰다. 충분히 손이 닿을 것 같았는데도 턱 없이 높다. 의자를 들고 나와 그 위에 올라서 보았다. 어림없다.
이럴 때에 사다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사다리가 있을 리 없다. 작년에 페인트칠을 하느라고 쓴 사다리는 조카네 회사 사다리였다. 할 수 없이 남은 페인트를 눈을 치는 눈 가래에 칠했다. 칠해놓고 보니 선뜻 눈에 들어와 좋다.
땅집을 짓고 살아내려면 사다리가 필수다. 창가에 으름덩굴을 심어놓고 그 줄기를 창문 위 등불걸이대에 올리는 데에도 사다리가 필요하다. 햇볕 좋은 남향 지붕에 고추를 널 때에도 사다리가 있으려면 있어야 한다.
어렸을 적 고향집에 사다리가 있었다. 기다란 나무로 만든, 어린 내가 들기엔 무거운 사다리였다. 지붕을 고치러 아버지가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시는 걸 본 뒤다. 나도 사다리를 세워달라고 어머니에게 졸랐다. 사다리를 타고 높은 데를 올라가 보고 싶었다. 몇 번이나 만류하시던 어머니도 나를 못 이기셨는지 사다리를 지붕 처마에 걸쳐놓아 주셨다.
“꼭 잡고 올라야 된다. 헛디디지 말고!”
어머니는 사다리를 부여잡으며 내게 신신당부를 하셨다. 나는 어머니가 잡으신 사다리를 타고 한 칸 한 칸 올라갔다. 그리고 그 끝에서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때 내 앞에 보이던 지붕, 고개를 뒤로 돌렸을 때 내 앞에 펼쳐지던 넓은 들과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구불구불한 우차길, 그 너머에 보이는 솔숲, 솔숲 너머로 언뜻언뜻 드러나던 윗마을 풍경들.
그 날 나는 사다리 덕분에 너무도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다. 신대륙을 발견한 항해자들의 환희가 그런 것일까. 나는 그때까지 내 나이에 맞는, 초등학교 3,4학년의 눈에 맞추어진 세상과 만나며 살아왔다. 늘 그만한 높이로 세상을 보아온 내게 그날의 세상은 분명 그 이전과 달랐다. 여태껏 이 세상의 측면만 보고 살아왔다면 그날은 하늘을 비상하는 새의 눈으로 세상을 조감한 셈이다.
늘 보던 길도 새로운 길처럼 낯설었다. 길이 납작했다. 집 앞을 휘어져 돌아가던 도랑도 납작해 보이고, 손수레도, 내가 벗어놓은 신발도 납작납작해 보였다. 그것들은 내가 늘 보아오던 그것들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들이면서 또한 전혀 낯설어 보이는 그것들이었다.
사다리는 낮은 곳과 높은 곳을 이어주는 기구다. 그러나 세상을 천천히 익혀가던 그 때의 내게 있어 사다리란 또다른 눈높이로 세상 보는 법을 알려준 인문학자나 다름없었다.
그 후, 나는 틈만 나면 담장에 세워둔 사다리를 탔다. 처음 사다리에 오르기 어렵지 한번 오르고 나면 두려울 게 없다. 두려움 보다 그 두려움 끝에 놓인 새로운 높이를 경험해 보고 싶은 유혹이 사뭇 컸다.
세상의 수평적 넓이에 눈을 떠가던 나는 그 무렵 종종 뒷들녘에 나갔다. 뒷들녘은 마을의 북쪽 들녁을 말한다. 그 들녘 끝에는 북향을 가리키는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방솔나무였다. 방솔나무는 멀리서 보면 평평한 운동장을 하나 머리에 이고 있는 듯 했다. 그러니 나무 기둥만도 서너 아름이 넘었다.
내가 그 방솔나무를 알게 된 건 그 평평한 운동장에 올라갔다온 동무들 때문이다. 그들이 전해준 바에 의하면 거기는 솔가지들이 엉켜있어 발 빠질 틈이 없이 탄탄한, 마치 맷방석 같은 곳이라 했다. 씨름을 해도 좋고, 공놀이를 해도 좋고, 드러누워 잠을 자도 좋은 곳이라는 거였다. 무엇보다 내 귀를 솔깃하게 한 건 별을 만져볼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러나 겁이 많던 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거기 오를 자신이 없었다. 나무가 크기도 컸지만 높기도 높았다. 어느 해질 무렵이었다. 다른 동무들은 다 올라갔는데 나만 올라가지 못하고 부러운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을 때다. 누가 사다리를 들고 와 방솔나무에 걸쳐놓아주었다. 방솔나무 인근에 사는 평달이 아저씨였다.
그때 나는 마치 하늘을 올라가는 기분으로 사다리를 타고 방솔나무에 올랐다.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한 때 집 마당 사다리에서 내려다보던 그 때보다 세상은 한결 더 넓었다. 나는 먼저 올라간 동무들과 반가운 마음에 얼싸안고 껑충껑충 뛰었다. 그러는 동안 저녁노을마저 사라지고 어둠이 온 하늘을 덮었다. 높은 데서 보는 하늘은 시시각각 빠르게 변했다. 어둠이 내리는가 하는데 하나 둘 저녁별이 뜨기 시작했다. 껑충껑충 뛰던 우리들은 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듯하게 나무 위에 누웠다.
어둠과 함께 별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붉은 사과만한, 노랗게 익은 복숭아만한, 그런 별들이 이슬을 타고 내려와 모빌처럼 주렁주렁 얼굴 위에서 흔들렸다. 정말이지 손을 뻗어 올리면 그 별들을 하나하나 만져볼 만큼의 높이였다. 그것은 방솔나무 아랫세상에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 신비한 밤의 세계에 젖어드느라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어디서 밤까마귀가 울 때쯤 별똥별 하나 길게 금을 그으며 떨어졌다.
“저 별똥별 누가 주울까?”
누가 이슬에 촉촉이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먼 사막의 깜둥이 아이가 줍는댔어.”
누가 대답했다.
“아니, 배고픈 여우들이 주워 먹는대.”
또 누가 그랬다.
그러는 사이에도 별들은 쉬지 않고 반짝였다. 출렁거리며 지나가는 은하수에선 서늘한 강바람 소리가 들렸고, 우리가 잘 아는 국자별에선 근댓국 냄새가 아련하게 났다.
“진세가! 진세기 어디 있노?”
그때 저쪽 마을길에서 이쪽으로 오는 등불 빛과 함께 진석이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밤이 깊었다. 다들 꿈에서 깨어나듯 벌떡 일어났다.
“조심해 내려오너라.”
그때까지도 팽달이 아저씨는 떠나지 않고 사다리 곁을 지켜주었다. 아저씨가 잡아주는 사다리를 타고 한 칸 한 칸 내려설 때마다 가랑이 속이 따스해지더니 이윽고 땅에 발을 디뎠을 때, 후텁할 정도로 여름밤은 다시 더워졌다.
우리는 어룽거리는 등불을 향해 불나방이들처럼 달음질쳤다.
생각해 보면 그때 그처럼 신비한 밤하늘을 내게 보여준 것은 사다리였다. 어린 아이가 점점 시야를 넓혀 가는데 있어 사다리만한 것이 또 있을까. 그저 그렇고 그런 밋밋한 것들을 새롭고 낯설게 보여주는 것에 사다리만한 것이 없다. 사다리야말로 세상을 또다른 눈으로 새롭게 보여주는 인문적 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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